매년 해온 것처럼 사남매와 사위들이 모여 올해로 일흔 여덟 번째를 맞는 엄마의 생신을 축하하는 오찬 자리를 함께 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복사꽃이 가려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막 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는 날이었다.
병풍 뒷면에는 자수를 완성한 `1971.2.24.`라는 날짜와 함께 엄마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내 나이 서른세 살 때였구나, 벌써 40년이 훨씬 넘었네, 참!” 감회가 깊으신 듯 병풍을 어루만지셨다. 오랜 세월의 더께가 쌓이는 사이에 표구 상태가 낡고 수놓아진 검정색 비단을 받치는 원단의 색이 바래기는 했으나, 여덟 폭에 한 땀 한 땀 수놓아진 그림에 서린 엄마의 정성과 공력이 절절히 배어나오는 듯했다.
포도 무늬가 새겨진 백자와 비취빛 상감청자, 금빛 찬란한 신라 왕관, 전설 어린 에밀레종의 모습 등 우리나라 국보급 유물 열여섯 점이 한 폭에 두 점씩 예서체로 보이는 유물 이름을 새긴 글자와 함께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다. 정교하게 새겨진 그 이름의 글자들도 유물 모습과 함께 찬연한 무늬를 이루고 있다.
엄마가 직접 바느질해 만드신 병풍 덮개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햇살 밝은 마루 끝에 앉아 곱게 수놓기에 열중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때 엄마는 수놓으신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의 빛깔처럼 곱고도 단아하고 청초한 모습이셨다. 병풍 속에 엄마의 젊은 날 모습이 다소곳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오래 묵은 세월의 냄새가 확 안겨왔다. 엄마의 세월 향기인 것 같아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께서도 생전에 엄마의 병풍을 무척 아끼시고 좋아하셨다. 안방 장롱 오른쪽 벽에 언제나 고아한 자태로 서서 고고한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는 병풍을 즐겨 바라보곤 하셨다. 아버지는 엄마가 수를 놓거나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시는 것도 무척 좋아하고 사랑하셨다.
그 아버지가 일흔넷 되시던 생신날 아침 폐렴으로 갑자기 쓰러지신 뒤 사흘 만에 가족들이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참으로 애통하게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와 함께 이십 년 넘게 행복을 다독이던 이층 주택에서 조그만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병풍은 굳게 싸여 장롱 위에 올려졌다. 아버지의 방을 잃은 집은 병풍이 서 있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세월이 흘러갔다. 어느새 나도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지명(知命)을 넘어서고 그 곱던 엄마도 산수(傘壽)를 바라보시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그 병풍이며 엄마의 고운 손길이 생각났다. 불현듯 전화를 드렸더니 장롱 위에 고이 얹히어 있다고 했다.
오늘 조촐한 생신연의 자리에서 엄마는 병풍을 흔쾌히 내놓으셨다. 소박한 선물과 약간의 용돈으로 감사의 마음을 드렸지만, 무엇으로도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하고도 값지고도 따뜻한 명품 선물이었다.
엄마는 예술적인 재능이 많으셨다. 어려운 시절을 살아오시느라 전문적인 공부는 못하셨지만, 아름답게 수를 놓는 솜씨 말고도 매듭 공예에도 소질이 있으셨고, 한국화와 서예에도 빛나는 재능을 보이셨다. 음색 고운 노래도, 바느질도, 요리 솜씨도 아주 뛰어나셨다.
그런 엄마의 예술적인 감각과 재능을 고스란히 맏딸인 내가 물려받은 것 같다. 나도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 미술 공부를 하였고, 시와 음악이 좋아 시를 쓰고 있고 노래도 즐겨하고 있다. 요즈음은 시와 음악을 아우르는 시낭송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
엄마가 나에게 당신의 고귀한 재능과 유산을 물려 주셨듯이 나는 나의 딸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 어떤 예술작품을 남겨 그들의 따뜻한 유물이 되게 할 수 있을까. 새로 시작한 그림이 이젤 위에서 저만의 색깔을 기다리고 있다.
우선 새로 왼 시 한 편 딸들에게 들려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