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건국대통령은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59세때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하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고, 양녕대군의 17대손 이인수씨를 양자로 들였다. 그는 고려대 상대를 나와 공군 통역장교로 복무했으므로, 대통령과 영어로 소통할 수 있었다.
당시 이 대통령은 한국어보다 영어가 쉬웠고, 주로 영자신문을 봤다. 그런만큼 국내정세에 어두운 면도 많았는데 대부분의 국내 소식을 측근의 `입`에 의존해 들었다.
대통령은 4·19가 `혁명`인 줄 모르고, 측근들이 “학생들이 벌인 잠깐의 소요”라 하자 그대로 믿었다가, 총소리가 요란하자 비로소 사태가 심각함을 알았다. 대통령은 비로소 여러 소식통을 통해 “많은 학생들이 죽고 다쳤다”는 사실을 들었고, “자유당정권을 해체하고 대통령 하야하라”는 것이 국민의 소리임을 파악하게 됐으며, 자유당정권이 주도한 정·부통령 선거가 역사상 유래 없는 부정선거였다는 것도 알게 됐다. 대통령은 지체 없이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다.
양자 이인수씨도 4·19때 시위에 참여했지만, 하와이에서 부자(父子)인연으로 만났다. 이승만 박사는 양자를 만나자 제일 먼저 국내정세를 물었다. 아들이 “젊은이들이 열심히 하고 있으니 잘 돼 갈 겁니다”라고 대답하자, 대통령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남들이 잘 돼간다는 말 믿지 마라. 그런 말 믿었다가 내가 이렇게 결딴났다” 인(人)의 장막이 `정치의 적`이란 것을 설파한 `회한이 담긴 말`이었다.
통치자는 `중심`을 잘 잡아야 하지만, 쓴소리도 잘 듣고, 듣는 귀도 넓어야 한다는 뜻이겠다.
/서동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