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1
휘젓기만 하고 떠난 바람 때문인지 모른다. 그녀에게 남자는 바람이었다. 그녀는 학교를 더 다녔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중에 꼭 다시 찾으러 오겠다며 입술을 깨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젖은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박스를 열었고 아기를 내려놓았다.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렸으며 심장은 쿵쾅거렸다. 걸음이 휘청거리고 머리는 매가 쪼아대는 것처럼 아팠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무겁고 창백한 얼굴로 돌아섰다. 짭조름한 액체가 흘러 입으로 들어왔다. 모르겠다. 사물들이, 저 앞 빌딩이, 횡단보도가 다 흐려 보였다. 그녀는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여자 2
그것은 불장난이었다. 게임이었다. 소녀는 재수가 없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덜컥 겁이 나긴 했지만,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키울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눈물 하나 흘리지 않고 손가락 하나 떨리는 것도 없었다. 다만 누가 자신을 보지나 않을까 그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그리고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거추장스러운 쓰레기를 치우듯 말랑말랑한 물건을 밀어 넣었다. 소녀는 시끄러운 음악과 번뜩이는 조명이 돌아가는 클럽으로 갈까 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곧장 어두운 피시방으로 향했다.
#남자
남자는 철없는 아내를 원망한다. 친자일 확률 0.001 퍼센트! 그는 도덕군자가 아니다. 두 딸을 키우기만도 빠듯한데, 어쩌란 말이냐. 생각 같아선 확 갈라서고 싶지만 딸들을 위해 참는다.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쉰다. 그러다 또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기 어렵다. 아내를 참 많이 사랑했는데 지금의 아내는 옛날의 그 아내가 아니다. 헤어질 생각은 없다지만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온몸에 힘이 빠져오는 것을 느낀다. 이건 내가 원했던 바가 아니야, 눈 한 번 질끈 감고 결국 그는 철제문의 손잡이를 당긴다.
#아기
저벅저벅 발소리와 함께 왔다. 무거운 발소리였다. 소리가 끊겼다. 손잡이가 당겨지자 띠~, 하는 벨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나를 내려놓았다. 사막이었다. 혼자였다. 온기에서 떨어져 나올 때 나는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축축해지며 두려웠던 것일까. 포대기에 싸여 있었지만 사람의 품과 손맛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본능, 그러나 훗날 나를 꺼내준 누군가의 손길을 원망하게 될 울음이었다. 날카로운 가시도 시퍼런 칼날도 들어있는 울음이었다.
아기들이 버려지고 있다. 첫울음을 터뜨린 지 채 며칠도 되지 않은 여린 생명들이다. 누가 그렇게 버리고 갈까. 어디에다 버리는 것일까. 아기를 낳았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키울 수 없을 때 아기를 넣어두는 곳이 `베이비박스`란다. 이곳에 아기를 두고 가야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상황이 있겠지.
처음 베이비박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아기를 넣어 다니는 캐리어이거나 일시적으로 아기를 맡겨두는 작은 공간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불법이지만 합법적인 것처럼 영아를 유기하는 것이 베이비박스였다. 방망이로 세게 한 방 얻어맞은 것 같다. 그러니까 그건 사물함에 가깝다. 그렇다면 아기가 사물이란 말인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많은 아기를 입양해 가는 스웨덴 정부의 사람들이 베이비박스의 실태를 조사하러 왔다. 먼 길을 날아온 그들이 차고 넘치는 서울의 베이비박스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좀 더 주의를 기울이고 조심했더라면, 미리 사회적 차원의 대책을 세웠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다.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두고 가는 사람들은 죽는 날까지 무거운 짐을 안고 괴로운 심정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중에는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후회하고 마음 아파하게 되리라. 그곳에 버려진 아기도 평생 상처를 안은 채 험난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
벚꽃이 진다. 갈 곳 모르는 꽃잎들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