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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가장 길었던 전화

등록일 2015-03-20 02:01 게재일 2015-03-2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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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상준 수필가대구수필문예대학 강사
재윤이와의 통화다. 내 생애 가장 길었던 전화다. 그는 첫돌 지나지 않는 둘째 손자다. 사십 여분 전화기를 귀에 대고 숨소리만 들었다. 처음엔 `행복은 찾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란 말을 떠올리며 즐거운 여행을 한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다녀간 녀석의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댄다. 며늘아기는 서울 가면 쉽게 볼 수 없으니 있을 때 실컷 정 나누기해야 한다며 연신 손자를 안겼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

며칠째 몸살감기로 앓아누운 아내가 급하게 나를 찾는다. 병원 응급실에라도 가자고 할 줄 알았다. 예상과 달리 손에 전화기를 들고 받아보란다. 며늘아기다. “아버님 집에 있는 전화기 아직 통화료 내지 않아도 되지요.” 엉뚱한 질문이다. 순간 평소 잘 통화되던 전화기에 문제라도 생겼나 싶어 긴장했다. 엉겁결에 아직은 무료라 답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재완이가 갑자기 놀이터에 가자고 못살게 한단다. 재완이는 첫째 손자로 재윤이 형이다. 형은 네 살이고 동생은 두 살이다. 재윤이가 잠이 막 들어 같이 데리고 갈 수도 없고 주위에 부탁할 사람도 없단다. 큰놈 데리고 어린이놀이터에 잠깐 다녀올 테니 작은놈 좀 봐 달란다. 한 고집하는 재완이니 달래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에 이해가 간다. 한데 손자는 서울 있고 나는 대구에 있다. 아이를 돌본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참 희한한 세상이다.

잠든 재윤이 옆에 전화기를 두고 놀이터에 나간다. 오 분 정도의 간격으로 전화 수화기를 들어봐라. 재윤이가 잠에서 깨어나 우는 소리가 들리면 자기 휴대전화로 연락해라. 설명을 들으니 아주 간단하다. 신문이나 책을 보면서도 아이를 볼 수 있겠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허락했다.

전화기를 귀에 대어본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깊은 잠에 빠져 행복한 꿈을 꾸고 있나 보다.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예찬`이 생각난다.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어린이의 자는 얼굴을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졌고` `고운 나비의 나래, 비단결 같은 꽃잎, 세상에 아무것으로도 형용할 수 없이 보드랍고 고운 얼굴`로 `더 할 수 없는 참됨과 더 할 수 없는 착함과 더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추고 그 위에 또 위대한 창조의 힘까지 갖추어 가진 어린 하느님`으로 만들었다. 어린이의 참모습을 바라본 마음이다. 영혼까지 맑게 하는 힘을 느낀다.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행복이 `내 여기 있소`하며 미소 짓게 한다. 그것도 잠깐이다. 방해하는 사람도 없는데 글을 읽을 수가 없다. 가끔 느껴지는 재윤의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신경이 쓰인다. 시계를 본다. 아직 이십 분도 지나지 않았다. 전화기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요하다. 전화기를 너무 멀리 놓고 간 것은 아닐까. 요에 솜이 많은 것은 아닐까. 잠버릇이 좋지 못해 엎어 자는 것은 아닐까. 방정맞은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괜히 불안하다.

완하게 가는 시계만 거듭 본다. 재윤이에게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울기라도 해 울음소리라도 크게 들리면 좋겠는데…. 옆에 자는 아내에게 불안한 속내를 드러내며 전화해도 괜찮을까 묻는다. 몸이 불편한 아내는 세상이 귀찮은 모양이다. 마음대로 하지 왜 자는 사람 자꾸 깨우느냐며 타박이다. 일각이 여삼추다.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조바심이 나 안절부절못하겠다. `그래 재완이도 삼사십 분은 놀아야지` 하며 위로를 삼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전화기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드디어 일이 났구나. 재윤이가 자다가 일어나 어미가 없으니 방 밖으로 기어가다가 머리를 문에 크게 부딪친 모양이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진정하며 며늘아기에게 전화했다. “아버님, 재윤이 벌써 울어요.” 하며 대답이 예사롭다. 초조한 심정을 그대로 전달할 수도 없고 “그래 `쿵` 소리가 났다. 집에 빨리 가 봐라.” 하고는 전화기에 온 신경을 모은다.

답답함을 참으며 기다린 지 십 여분. “재윤이 아직 자고 있는데요.” 거참, 이럴 수가! 분명히 `쿵` 소리가 났었는데.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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