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선생의 `잘 표현된 불행`에서 `어머니의 환유` 일부분을 인용했다. 환유를 일컬어 결여된 은유라고 표현한 저 독창적 말씀에 매료되어 내 식의 해설을 쓰고 싶어졌다. 자세하게 분류하자면 여러 가지로 뻗겠지만 일반적으로 환유라 하면 표현하는 대상을 그것과 가까운 다른 말로 바꿔 말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앞치마가 환유가 되면 주부를 뜻하고, 월스트리트가 환유로 읽히면 영향력 있는 금융세력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선생의 저 말을 나는 은유로 소진되고 남은 것들이 모여 환유가 된다, 라고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은유는 낭만이나 환희나 쾌락 같은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 라는 식의 낭만적 은유가 지나고 난 뒤의 파편 같은 현실이 환유가 된다. 저 인용문에서 결여된 은유는 어머니의 환유가 되는데 그것은 곧 자식인 작가 자신이다. 물론 그 원천은 작가의 아버지가 된다. 일반적 희생의 이미지인 모성에게 지아비의 결여는 세상의 결여이고 그것은 곧 당신의 결여가 된다. 그 결여의 기도는 자식을 향한다. 즉 어머니의 환유는 결국 아버지 모습을 한 자식에 대한 기대치라 할 수 있다. 그런 어머니가 자식 입장에서는 정신적인 우주가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제 결여를 다독이기 위한 텃밭으로 기능한다.
언어학자인 로만 야콥슨에 의하면 은유는 유사성에 의존하고, 환유는 인접성에 의존한다고 했다. 유사성을 표현하는 언어는 어쩐지 낭만적이고, 인접성을 표현하는 언어는 왠지 사실적이다. 낭만적 자족이 은유라면 결핍의 우주야말로 환유가 된다. 그러니까 환유의 발자국은 몽상의 구름에 가닿는 게 아니라 사실의 들판에 맞닿아 있다. 환유가 살아있는 실체적 진실이 되는 순간이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