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말한다. “어릴 때부터 키가 크지 않은 것에 대해 나쁜 감정이 없었다.” 라고. 우리와 문화가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 타일러에게 단신 콤플렉스가 없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대중적 잣대가 곧 가장 옳은 생각`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상태라면 그의 단신은 배려해야 할 사항이 되고 만다. 방송용 화보 촬영을 할 때 자신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소위 말하는 깔창이 들어간 신발을 주는 것을 보고 타일러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기분이 나빴다고 했다. 키가 작다는 사실이 졸지에 동정 받거나 감춰야 할 사안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우리 식으로 보면 배려한다고 한 행동이 미국적 환경에서 자라난 그에게는 무례한 오지랖으로 비쳤을 것이다.
본인은 괜찮은데 타자가 괜찮지 않은 것, 대중적 잣대는 이런 욕망을 부추긴다. 아나운서는 반듯한 이미지여야 하고, 남자라면 모름지기 키 정도는 커줘야 하는 것, 이런 시각들에 대중은 길들여지는 것이다. 길들여진 그 생각은 참 생각이 아닌데도 어느 순간 내 욕망의 잣대가 되어 버리고 타자의 욕망까지 관장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만다.
타자의 욕망을 내가 정할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한데 욕망의 기준을 정해 놓은 우리는 타자에게까지 그것을 적용하는 무례를 범한다. 중요한 것은 그런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때도 많다는 것. 어떠한 그럴듯한 외형도 깊이 숨은 내면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데도 우리는 보이는 대로 일반화하고 규격화하기를 즐긴다. 그것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내 욕망이 곧 타자의 욕망이라고 단정해버리기까지 한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