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에서 발견한 문구이다. 작가 자신을 투영한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는 고뇌하고 기록하는 영혼의 산책자이다. 같은 생각 앞에서 작가는 기록하고 독자는 공감한다. 그게 작가와 독자의 차이점이다. 공감의 독서만큼 값진 것도 없으니 이 경우 작가와 독자는 서로 이기는 게임이 된다.
유능한 고양이가 살찐 쥐를 차지한다, 는 서양 속담이 있다. 페소아의 저 인용글에서 `잘나가는 회사의 직원`은 살찐 쥐에 해당된다. 반면에 작가의 분신인 소아레스는 비쩍 마른 쥐에 해당될 것이다. 페소아 입장에서는 살쪘든, 말랐든 쥐는 쥐일 뿐이다. 고양이에게 먹힌다는 면에서 그 둘의 운명은 같은 셈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살면서 모든 사람들은 착취당하기 마련`이므로.
있는 자의 쾌락은 없는 자의 눈물 없이는 지탱할 수 없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구조이고 신자유주의의 실체이다. 허무주의적 견지에서 현실을 보면 어차피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구조로 세상은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페소아의 통찰을 더 깊이 허무주의적 입장에서 살피면 다음과 같은 말도 성립된다. 외부의 그 어떤 상황도 자신 내면보다 우선하지는 않는다는 것. 지속 가능한 내면의 일상성이 유지되는 한 바스케스 씨를 위해 일하는 소아레스는 평화롭다. 힘겨워도 허영과 불가능을 위해 혹사당하는 것보다는 양심적이기 때문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스스로 제 영혼을 갉아 먹는다는 인식을 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자의식에 곰팡이가 스미는 그 때야말로 소아레스는 바스케스 씨를 떠나야 한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