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맵다. 다소 맹랑하긴 하나 내가 기다리는 건 아버지가 아니라 고모가 살뜰히 챙겨줬을 보따리다. 한 번도 예외가 없었으니 오늘도 틀림없이 우리 부녀 입맛에 꼭 맞는 것들을 보냈을 터다. 이번에는 뭘 주었을까? 지난번에 보내 준 고추 튀각은 고소했고 우엉 김치는 밥도둑이 따로 없었는데 생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드디어 양손에 짐 보따리를 든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한껏 상기된 얼굴로 짐을 받아 든다. 허리가 휘청인다. 무엇이 들었기에 이렇게 무거운 걸까? 손톱이 얼얼할 정도로 용을 써 매듭을 풀어보지만, 쉬이 열리지 않는다. 요리조리 돌려가며 겨우 푼 보자기 안에는 어른 주먹만 한 감자와 양파, 아침 이슬이 묻어날 것 같은 진보라색의 가지. 줄 세워 둔 군인처럼 반듯한 미나리며 상추, 부추가 손질되어 있다. 입성이 걸지 않은 아우는 감자볶음을 좋아하고 조카는 생나물 없이는 숟가락을 들지 않으니 맞춤 식재료이다. 또 다른 보따리는 눈보다 코가 먼저 반응한다.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단박에 알 수 있는 것이 토종의 냄새다. 마늘과 청양고추를 넣고 버무린 쌈장과 검지만 탁하지 않은 간장, 거기에 맑은 노란빛의 참기름까지. 여기서 끝이면 서운하다. 공들여 화장한 듯 고운 빛깔을 내는 깻잎 무침과 군내나지 않은 김장 김치, 구색도 골고루 갖췄다.
고모 나이 아홉 살, 전쟁 통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 충격이 잦아들기도 전에 돌림병으로 아우 둘까지 한날에 놓쳤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동생이 아버지와 막내 고모다. 하루아침에 가장이 된 할머니는 남은 자식들 키우느라 밤낮없이 일만 하였고, 고모는 다니던 학교마저 관두고 동생 둘을 건사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아우들을 향한 내리사랑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언제였던가. 고모가 농사일로 몸살이 났다. 안타까운 마음에 퇴직하고 집에 있는 아버지에게 일을 시키라고 했더니 아까워서 못 그러겠다고 한다. 고모 인생에서 동생은 자식과 버금가는 존재인가 보다. 그런 동생이 장가가서 얻은 조카였으니 그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겠는가.
유년 시절 나는 잘 걷지 못했다.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아파서 중간중간 쉬어야만 했다. 한 날은 유치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십분 남짓 걸리는 짧은 거리를 걷지 못하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거짓말처럼 고모가 나타났다. 밭에서 일하는데 까마득히 먼 곳에서 시작되던 내 울음소리가 점점 선명해지더라는 거였다. 그 길로 쫓아 왔노라 말하는 고모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몇 해 전,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준비 기간도 길었지만 온 열정을 바쳤던지라 상심이 컸다. 여러 달을 허송세월로 보내던 중에 고모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청구를 듣겠거니 했는데 뜬금없이 당신 등대의 불이 꺼지려고 한다는 거였다. 수수께끼 같은 말에 반응이 없으니 내가 당신의 등대라고 했다.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위해 불을 비춰주는 것이 등댄데 어찌 내가 그런 존재란 말인가. 몸도 성치 않고 엄마가 없어서 밑반찬까지 신경을 써줘야 하니 고모에겐 짐 덩어리가 맞다. 놀리는 듯한 고모의 말에 불퉁거렸더니 인생을 살다 보면 짐이 사람을 살리는 약일 수도 있다고 했다. 당신이 아니면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근심 덩이인 내가 삶의 의미가 되어 버린 것일까? 그때는 이해되지 않던 말이 고모의 허리가 굽어질수록 아버지의 검은 머리칼 숫자가 줄어들수록 알 듯하다.
`삐리링. 삐리링` 밥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지난날을 걷고 있는 나를 깨운다. 큰 대접에 하얀 쌀밥을 뜬다. 오늘만큼은 소식(小食)하는 우리 부녀의 오랜 식습관이 무너지리라. 아버지에게는 어머니 같은 누나, 나에게는 생명수 같은 고모가 마련한 밥상임을 알기에 푸지게 먹을 것이다. 모쪼록 더디게 소화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