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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사랑

등록일 2015-02-13 02:01 게재일 2015-02-1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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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렬수필가
사랑만큼 고귀한 것이 있을까? 그 여자의 사랑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랑은 아니었다.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 한 귀퉁이에 남아 있는 푸른빛이 애처롭게만 보이던 어느 날. 28세 처녀가 충청북도 음성꽃동네를 찾아왔다. 그녀는 고아로서 18세가 되면서부터 보육원에서 나와 독립된 삶을 살아야만 했다. 주위에 아무도 돌봐 줄 이 없는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몸을 파는 수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고의 십 년 세월에 마지막으로 붙은 이름은 자궁암 말기 환자였다.

평소에 그녀가 어머니로 부른 그분은 다행히 악덕 포주는 아니었다. 그분은 죽살이 고개를 힘겹게 넘고 있는 그녀의 생명을 연장하고자 서울의 큰 병원에까지 가 보았으나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다시 지필 수는 없었다. 많은 노력을 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찾아온 종착역이 이곳이었다. 평생토록 한 번도 옳게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받게 하면서 마지막 생을 보듬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오로지 중환자실에서 전혀 거동하지 못하는 다른 환자들을 돌보는 것으로 밤낮을 잊고 봉사의 길을 걸었다.

그런 생활을 하던 중에 27세가 된 한 청년의 병간호를 하게 되었다. 그는 경직성 마비증 환자로서 말도 할 수 없고 몸 하나 까딱하지 못하였다. 단지 큰 소리로 우는 것과 눈꺼풀을 움직여 의사 표시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남자 곁을 수개월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하여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함께 지내는 날이 계속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점차 정분이 쌓여 갔을까? 보통 세인의 눈으로 보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고 비극적인 만남이라고 쉽게 단정해 버릴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애절하여 간단히 보아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사랑의 가치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이들 남녀의 정분도 사랑이라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사랑과는 분명히 다를 것만 같았다. 이들의 사랑은 이수일과 심순애의 사랑도, 시베리아로 유형(流刑)을 떠나는 카추샤의 뒤를 따라가는 네플류도프의 사랑도 아닐 것이다. 설렘이나 열정의 사랑뿐만 아니라 위안과 치유의 사랑도 더없는 고귀한 사랑이 아닐까 싶었다.

사랑의 힘은 육체적 통증도 잊게 하였던가. 그렇게 불편한 육체를 가진 두 사람의 몇 개월도 사랑이고 행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태울 수 있었던 위안의 사랑과 생명의 불꽃도 불과 8개월 정도뿐이었다. 마지막 혼불을 태우듯 그녀는 최후의 막음불질을 끝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다.

자신의 모든 장기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기증하면서, “이런 몸도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요?”라는 한마디 말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가 죽던 날 밤, 아무도 청년에게 그녀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청년은 하염없는 눈물만 쏟고 있었다고 한다.

사별의 순간에도 사랑의 심령(心靈)은 서로 통하는 것일까. 사랑의 힘은 육체적 아픔과 죽음의 고통마저도 잊게 할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숭고하고도 비장한 사랑의 힘 앞에 나는 그냥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절망을 사랑으로 승화한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이곳 꽃동네의 푸르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오래도록 전해지고 있었다.

극단적인 절망의 늪에서 한 오라기의 행복을 갈구했던 삶 앞에서 그들이 보여준 숭고한 사랑의 의미를 오래도록 내 가슴에 담아 두고 싶다.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따뜻한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마음을 담지 못한다면 어찌 인생을 고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남에게 뿌려줄 사랑의 씨앗이 담겨 있고, 남으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아야만 행복의 싹을 틔울 수 있는 씨앗도 뿌려져 있다.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이 없는 인생이란 한 줄 외줄에 걸린 슬픈 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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