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부터 쌤 냄새가 나요.”
“냄새? 운식아, 쌤 냄새가 어떤 거야?”
“그런 거 있어요. 쌤 냄새~.”
“좋아? 나빠?”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향은 기억의 통로이다. 팔공산으로 가는 과수원을 지날 때는 가끔 퇴비냄새가 난다. 그러면 나는 차문을 열고 서행하며 깊은 숨을 들이쉰다. 생각지도 못한 고향의 기억들이 불쑥불쑥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흙에 묻혀 사시는 아버지가 떠오른다. 산사입구에 들어설 때 옅게 피어오른 향내에서도 나는 아버지를 생각하곤 한다. 향을 피우고 독경하는 정갈한 아버지의 모습을.
향은 사랑의 촉매이다. 연애할 적 그와 다툰 뒤 소원해진 적이 있었다. 먼저 화해를 신청할 줄 알았던 그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고 냉전은 꽤 길어졌다. 어느 날 나는 그의 자취방을 말없이 찾아갔다. 남산동 골목 끝자락 후미진 문간방. 그곳에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우리 둘 만의 올망졸망한 시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 시간들을 다시 확인하고 나면 뭔가 선명해질 것도 같았다. 방은 비어 있었다. 나는 벽에 걸린 그의 재킷에 얼굴을 묻었다. 순간, 그의 냄새가 내 가슴으로 들이쳤다. 그의 냄새가 부드럽게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고 내 등을 토닥였다. 나는 그 따뜻함에 울컥해져 방안을 둘러봤다. 윗목에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구나. 지금도 냉전이 길어지면 그의 옷에 얼굴을 묻어본다.
향은 에로스의 완성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에로틱한 장면을 생각하면 커피향이 먼저 떠오른다. 영화였는지 책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진 않는데, 주인공인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기 전엔 으레 커피를 마시곤 했다. 게임하듯 서로를 탐색하는 긴 시간이 흐르고야 하나가 되려는 갈망의 시간이 온다. 그녀는 매번 뜨거운 커피를 아주 천천히 마신다. 연인의 어깨에 기대어 소로록 커피를 마시는 그녀에게 생은 온전히 그녀 편인 듯했다.
어느 날, 내게도 그런 명장면을 연출할 기회가 왔다. 두 아이가 캠프를 떠났다. 집근처 구이 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오랜 만에 그의 팔짱을 끼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느리게 걸었다. 그리고 침대에서도 느리게느리게 걸었다. 나는 가능하면 몽롱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그에게 속삭였다.
“커피 좀 타줘.”
순간 들려온 무뚝뚝한 그의 목소리는 내 꿈을 산산조각 냈다.
“늦은 밤에 무슨 커피, 하여튼 중독이야.”
완전한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꿈 꿀뿐. 너와 나의 만남은 너와 나의 시간 속에서 항상 미끄러진다. 결국 완전한 만남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한다. 아니, 모든 시간은 떠나온 다음에야 비로소 완전해진다. 떠남은 내 속에 그대의 집을 짓고, 그대 속에 나의 집을 짓게 한다.
향은 존재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우리 육신이 물과 바람과 먼지로 돌아간 후에도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것은 향이 아닐까 싶다. 자신만의 고유한 향이 한줌 남아 허공을 맴돌다 어느 시간 어떤 공간에서 누군가에게 기억의 문을 열어주는 것은 아닐까.
나는 오늘도 커피를 마신다. 커피향을 맡으며 당신의 문을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