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의 기부 실적이 별로라고들 한다. 경제 영토를 넓히고 소비 수준으로 보면 소득 3만 달러 시대로 간다고 하지만 여전히 국민 한사람의 기부액은 미국의 10분의 1 수준이다. 그래도 기부에 한번 맛들인 사람들은 경기가 어렵다고는 하나 조금씩이라도 보탠다. 미국의 자선가 록펠러는 33살에 백만장자, 10년 후엔 미국 최대갑부, 53살엔 세계 최대부자가 됐지만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53살이던 해 불치병으로 사형 선고를 받던 날, 딸의 입원비 문제로 울부짖는 환자의 어머니의 딱한 처지를 보고 소녀를 도울 결심을 한다. 록펠러는 후일 그 소녀를 입원 시켜 새 생명을 열어준 날이 가장 행복스러웠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55년을 쫓기며 살았지만 자기 것을 나누기 시작한 후반기 43년이 가장 행복하게, 사람답게 살았으며 세기적 기부 왕으로 이름을 후세에 남겼다.
빈민가에서 태어나고 치명적인 심장병까지 앓았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몸엔 문신이 없다. 문신을 하면 헌혈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호날두는 소말리아에 300억원을 기부했으며 아동 구호 운동가로 경기장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축구 선수 가운데 가장 높은 몸값을 받는 호날두의 연간 기부액은 개발도상국 중진 국가의 국민이 낸 기부금액보다 많다.
필자가 기부권유 강연에서 자주 인용하는 말은 세기적 영화배우였던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1929~1993)의 어록이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나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눠라./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위한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남을 돕는 손이다./” 오드리 햅번이 1993년 1월 20일 눈을 감기 1년 전쯤 자녀들 앞에서 세상에 남긴 말이다.
햅번은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늘 마음은 가난 했었다. `스티브 스필버그`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 `영혼은 그대 곁에`(1989년)에 우정 출연, 노익장을 뽐내었을 즈음부터 아프리카 돕기에 뛰어들면서 달라졌다.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 그의 보수는 1년에 1달러. 교통비 숙박비 지원이 전부였으나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아프리카는 물론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그녀의 발길이 닿은 곳은 50개국이 넘는다.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곧 축복이다” 병에 걸리고 먹지 못해 눈빛을 잃어버린 아이들, 피고름이 범벅이 된 아이들을 스스럼없이 안고 눈물을 줄줄 쏟는 장면이 미국과 유럽에 방영되면서 기부금과 구호물자가 쏟아졌다.
1992년 내전에 시달리던 소말리아를 방문한 헵번은 마을 빈터에 버려진 자루더미가 굶고 병들어 죽은 아이들의 시체라는 말을 원주민들로부터 듣고 잠시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소말리아에 더 강한 애착을 보인 동기가 됐다.
그녀의 행복론은 지인의 권유로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돼서부터 더 빛났다. 미국에서 열린 연말 기금모금 행사에서 출발, 아프리카 아이들의 핏기 잃은 현장을 누비면서 영화에서 꺼져가던 자신의 열정을 살려 냈다.
1929년 브뤼셀의 한 병원에서 백일해로 간신히 살아났으며 나치의 추종자였던 아버지가 떠나고는 할아버지 손에서 꿈 많은 소녀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추억을 갖고 있었다.
데뷔작 `로마의 휴일`은 동화 같은 공주님의 사랑 얘기다. 기자 역으로 열연한 그레고리 펙과 함께 로마를 무대로 한 1시간 30분짜리 영화는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영원한 연인으로 만들었다. 이 영화로 영국과 미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 세기적 스타덤에 올라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페어 레이디`등 박스 오피스 1위에 오른 작품의 주인공이 됐다. 당시 햅번 스타일이 된 짧은 커트는 지금도 유명하다. 세기적 배우가 됐지만 행복스럽게 만들지는 못했던 헵번은 아프리카 땅만 밟으면 얼굴에 생기가 돌고 빈민가를 미친 듯이 뒤졌다고 하며 나눔에 대한 철학적 이론가로도 세상에 드러났다. 평생 중독되지 않을 행복 마약을 펑펑 쏟아낸 그의 얘기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