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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화가 피었습니다

등록일 2015-01-16 02:01 게재일 2015-01-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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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현숙수필가
달달한 향기를 풀어놓는 봄은 황홀하다. 오뉴월이면 금은화도 사방으로 향기를 풀어낸다. 담장과 좁다란 수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빌라와 산이 이웃해있다. 1층에다 동향(東向)이라 햇살결핍에 시달릴 걸 뻔히 알면서도 선뜻 이 집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산 때문이었다.

갓 내린 커피를 들고 주방 창가로 간다. 창을 활짝 열어젖힌다. 밖에서 기웃대던 꽃향기가 냉큼 안으로 들어온다. 뻐꾸기소리도 잽싸게 따라 넘는다. 상쾌하다. 꽃향기가 커피향기에 잠시 밀려난다. 꽃무더기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향기롭다. 담장 위의 금은화는 밤새 안녕할까?

“헉, 저게 뭔 일이래?”

황급히 커피 잔을 내려놓고 창가로 바짝 붙어 선다. 분홍셔츠에 등산화까지 단단히 챙겨 신은 웬 낯선 할머니 한 분이 꽃을 따고 있다. 노랑나비 두 마리가 정신없이 할머니 주위를 맴돈다. 날갯짓에 황망함이 묻어난다. 저러다 꽃들이 몰살 되진 않을까 내 마음도 조급해진다. 어찌해야 하나. `뭐하는 짓이에요.` 냅다 소리라도 질러볼까. 속으로는 열두 번도 더 솟구치는 소리가 당최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내가 참 바보 같다.

발만 동동 구르는 동안 할머니의 손놀림은 더 빨라지고 옆에 놓아둔 비닐봉지의 배는 점점 불러간다. 나는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창가에서 전전긍긍이다. 그새 꽃은 삼분의 일이나 사라졌다. 할머니의 소행을 몰래 폰 카메라에 담는다. 문우 H선생에게 사진과 함께 속상함을 잔뜩 담은 문자를 날린다. 답장 대신 전화가 온다. 후딱 달려 나가 할머니께 부탁드려 보란다. H선생의 말에 선바람으로 달려 나간다. 남은 꽃이라도 지켜야한다.

봄이 오자 비탈에도 거짓말처럼 새싹들이 돋아났다. 겹겹이 쌓인 돌들 틈새로 띄엄띄엄 용케도 뿌리를 내린 모양이다. 가장자리를 따라 돋아난 강아지풀과 밉상덩어리 환삼덩굴마저도 예뻐 보였다. 초록이 더해지자 비탈에는 생기가 돌았다. 거기서 피어난 금은화를 처음 보았을 때 눈물 나게 반가웠다. `인동초`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금은화는 해를 거듭할수록 튼실하게 영역을 넓혀갔다. 뻗어 나온 덩굴은 탐스러운 꽃무더기를 이루었다. 봄이면 희고 노란 꽃들을 환하게 피워내는 모습이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가 없었다.

갑작스런 인기척에 할머니가 놀라실까 헛기침을 했다. 무슨 말부터 어떻게 꺼낼까 쭈뼛대는데 할머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여전히 손은 멈추지 않는다. 꽃을 따지 말라고 까칠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필이면 여기에 핀 꽃까지 꼭 그렇게 따셔야겠냐고, 눈물겹게 피어났을 꽃들이 가엽지도 않느냐고 앙칼진 목소리로 마구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할머니 앞에 서니 말은 보들보들 강아지풀 꼬리가 되어 기어 나온다.

“할머니, 위험하게 어째 거기까지 올라가셨대요. 그 꽃은 따서 뭐 하시게요? 따시더라도 다 따진 마세요. 이런 곳일수록 꽃이라도 환해야지요.”

생각 따로 말 따로 튀어나온다. 기가 막힌다.

“꽃이 하도 탐스러워서 따보는 거유. 아까워서 말이지. 안 그래도 땡볕이 뜨거워서 그만 내려갈까 했다우.”

내 표정을 읽었는지 할머니는 머쓱해하신다. 꽃차로 달여 마실지 효소를 담글지 하시며 일어서는 할머니 손에는 제법 불룩해진 비닐봉지가 들려있다. 돌담 위에서 기다시피 내려오신 할머니는 뒷골목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꽃무더기의 절반이 휑하다. 반쯤 밀다가 만 떠꺼머리 같은 몰골을 보니 내 가슴도 휑해진다.

금은화는 한 덩굴에 흰색과 노란색의 꽃이 섞여 핀다. 수정이 되기 전에는 흰색, 수정이 된 후에는 노란색으로 변한다. 이미 수정 된 꽃들을 곤충들이 다시 찾아드는 헛수고를 덜어주려는 꽃의 배려란다. 동시에 효율적인 수정을 돕는 일이기도 하다니 배려가 향기만큼이나 감미롭다. 종의 번성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꽃들도 잘 아는 모양이다.

위험한 비탈에다 굳이 텃밭을 만드는 사람들과 꽃을 따버린 할머니의 욕심이 씁쓸하다. 욕심이란 이기심에서 생겨난다. 이기심을 조금만 덜어내면 우리네 세상도 한결 더 향기로워질 텐데. 식어버린 커피 맛이 너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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