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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경제 효자 노릇한 해외건설

등록일 2015-01-15 02:01 게재일 2015-01-15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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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수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
▲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

근래 들어 이슬람 강경파들의 테러가 이어지면서 종교 갈등이 세계적 핵심 이슈가 되고 있다. 여기에 세계경제의 불황이 예고되면서 유가가 급락을 거듭하는 등 이래저래 중동지역이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이러한 중동지역은 우리나라 경제발전과도 지대한 관계에 있다. 오늘날 우리 경제가 여기까지 오는 데는 몇 차례 고비들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 중에는 중동지역 중심의 해외건설도 큰 효자노릇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해외건설은 현대건설이 주도하였다. 현대건설은 1965년 11월 태국에서 98Km의 2차선 고속도로를 수주하면서 우리나라의 해외건설이 시동을 걸었다. 현대는 악조건이었던 이 공사에서 300만 달러의 적자를 보았지만 장비운용과 아스콘생산, 인력관리방법 등 귀중한 노하우를 얻었다.

당시 우리나라 건설업체 대부분은 주한미군 발주공사로 연명하였지만 현대는 이 공사로 국제적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1967년부터 시작된 경부고속도로 공사는 본격적인 해외건설 진출의 밑거름이 됐다. 1970년대까지는 전쟁 중에 있었던 베트남이 우리나라 해외건설의 중심지였고, 대부분 미군이 발주한 공사였다. 또한 1972년에는 현대건설이 인도네시아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했는데, 공사비가 3천200만 달러로 당시로서는 해외건설 최대 규모여서 국민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1973년에는 삼환기업이 사우디 고속도로 공사를 했으나 250만 달러의 적자를 봤다. 이유는 세계적 유류파동으로 자재비가 폭등했기 때문이었다. 물가상승에 대한 보상계약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적자는 불을 보듯 뻔했던 것. 큰 대가를 치른 후에야 설계도와 시방서 간에 차이가 있을 때는 시방서에 따른다는 소중한 국제관례를 얻을 수 있었다. 여기에 해외건설 행정업무가 매우 지연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입찰부터 시공까지 각 부처 간 협의가 복잡해서 행정업무 때문에 해외건설이 지연,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1974년 김재규 건설부장관 재임 당시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한 `해외건설촉진법`이 제정되었고, 건설부에 `해외건설국`이란 직제가 신설됐다. 당시 필자는 해외협력관실에서 이 법의 시안을 담당한 주무계장으로 근무했다. 이 법에 따라 해외건설 도급허가를 얻게 되면 입찰자격, 송출 자재 및 인력 등 모든 부처의 업무를 생략하는, 즉 관계부처 협약 없이 해외건설 업무가 속전속결로 처리될 수 있었다.

건설부는 또한 한국기업들의 신뢰도를 높인다는 차원에서 국내의 20대 대기업으로 컨소시엄을 구성, 해외건설주식회사도 설립했다. 입찰 때는 정부에서 보증까지 서 줬다.

이러한 경험과 제도를 축적한 우리나라 해외건설은 1973년의 오일쇼크를 거쳐 1975년부터 불붙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해외건설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공사는 바로 1976년 2월 현대건설이 금세기 최대의 토목공사로 불렸던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만 공사를 거의 기적적으로 수주한 일이다.

당시 현대건설이 입찰에 참가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선진국들의 방해 작업은 그들의 체면을 구길 정도였다. 그것은 세계 최대의 토목공사를 기술력이 부족한 현대건설에 맡길 수 없다는 자만심에서 비롯되었다.

네덜란드 영국 독일 등이 합작한 회사가 15억2천만 달러로 최고입찰가를 보였지만 현대건설은 고작 9억3천만 달러를 써 냈다. 최저가격이었다. 이마저도 네고를 통해 계약을 맺었지만 선수금만도 2억 달러에 달하였다. 현대가 수주했던 공사금액 9억3천만 달러는 당시 우리나라 정부예산의 50%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현대건설은 이 공사를 통해 일약 세계적인 건설회사로 부상했다. 현대건설의 이런 수주에 대해 국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최소 15억 달러의 공사를 9억3천만 달러로 최저 입찰했으니 현대건설의 앞날이 우려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기우였음을 현대건설은 증명했다. 이 공사는 연인원 400만 명을 필요로 했으며, 하루에 200명의 기술자와 3천600명의 기능공들이 필요했다. 해외건설이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하였던 1977년에는 해외로 진출한 우리나라 근로자들이 무려 18만여 명이나 됐다.

포항에서도 500~600여 근로자들이 해외건설에 진출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포항상공회의소 강신우 회장이 이들의 해외진출에 필요한 서류를 보내오면 필자가 이를 받아 처리하기도 했다.

해외파견 근로자들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불상사도 빚어졌다. 1977년 3월 3천여 근로자들이 주베일 공사현장에서 인간적인 대우와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폭등에 가까운 노사분규를 일으키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물론 이 사건의 발단은 사무국 직원들의 오만과 기능직 직원들이 피해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서로의 불신이 깊어진데 그 원인이 있었지만 해외진출 수요가 급증한것도 한 원인으로 파악됐다. 고급기술을 갖고 먼저 진출한 근로자들보다 상대적으로 기술이 낮고 후에 진출한 근로자들이 노임을 오히려 더 많았던 것도 한 원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들 근로자들은 기능공이 아닌 기능직 사원이라는, 신분을 높인 명칭으로 중동현장에 파견되었고, 그들의 기술 수준 또한 크게 향상되는 효과를 낳았다. 그리고 당시 중동을 다녀온 근로자들은 TV와 냉장고 등을 구입하는 등 삶의 질이 달라지면서 중산층 대접을 받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현대건설이 세계 최대의 공사로 불리던 사우디 주베일 공사를 수주했던 1977년부터 1983년까지의 8년간은 해외건설의 황금기였다. 이때는 연평균 65억 달러에 달하는 수주가 이루어졌다. 괄목할 성장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부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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