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한두 명은 사정을 알 터이나 대부분은 상황을 잘 모르니 카톡 단체방에는 불이 났다. `희정이가 빠지면 나도 탈퇴다, 회장은 책임지고 희정이를 고대로 모셔 놔라, 희정이 없는 모임은 연탄 없는 난로다.` 등 남자애들의 농 섞인 걱정 문자가 올라왔다. 카톡방에서 나가 버린 희정이가 그 문자들을 못 본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 중 한 문자에 눈길이 간다. “웬만해선 안 올 애가 아닌데.” 이 한마디 안에 희정이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총체적으로 녹아있음을 느꼈다. `웬만해선`이라는 매혹적인 한정어 때문이었다.
누군가로부터 `웬만해선`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만 살아도 잘 살고 있는 거다. `웬만해선 그럴 사람이 아냐, 웬만해선 그렇게 힘들어 할 애가 아니지, 웬만해선 지치지 않을 사람인데, 웬만해선 늘 남을 우선하던 사람이지.` 등의 예문처럼 `웬만하면`이라는 말이 타자를 향할 때는 참으로 듣기 좋다. 그 사람에 대한 이해와 관용의 최대 표현법 같기 때문이다.
반면에 `웬만해선`이라는 말이 스스로를 향할 때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웬만해선 내가 이런 실수 하지 않는데, 웬만해선 내가 흥분하지 않는데, 웬만해선 내가 약속을 어기지 않는데.`등등의 사례처럼 `웬만해선`이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남발하면 신뢰가 반감된다. 자신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타자에게 바라는 변명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웬만해선` 이라는 말은 타자를 이해하거나 감싸주고 싶을 때 더 어울린다. 스스로를 향하는 `웬만해선`이라는 말은 아낄수록 좋다. 꼭 써야 한다면 변명이 아니라 자기반성용이라야 한다. 역시 실천이 어렵다. 그나저나 웬만해선, 이라는 다사로운 수식어를 받는 희정이에게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