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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 열차

등록일 2015-01-09 02:01 게재일 2015-01-0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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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복희수필가
Y문학회에서 강원도 태백으로 눈꽃 열차 테마여행을 갔다. 태백도 겨울 기차여행도 처음이어서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동대구역에는 남극의 펭귄 떼 같은 인파가 대합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더욱 들뜨고 상기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 플랫폼에 대기한 기차 속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갔다. 기차는 수많은 인파를 삼키고도 무거운 내색 하나 없이 기운차게 출발했다.

차창 밖 풍경을 보며 아련한 추억을 잠깐씩 되새기는 재미도 쏠쏠하다. 잔설 위로 다시 눈이 퍼붓기 시작한다. 눈꽃 테마에 때맞추어 눈이 내려주니 행운이다. 18년을 멈추지 않고 레일 위를 달리는 영화 `설국열차`의 설경도 떠오른다. 열차는 간이역마다 서고, 사람들은 그때마다 오르내리고 기차는 또 달린다. 거의 다섯 시간이나 가다 서다를 반복했지만 지루한 줄 몰랐다. 철암역에 도착하자 터진 콩자루에서 콩알 쏟아지듯 인파는 눈발 속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태백의 눈꽃 축제장은 다양한 볼거리로 넘친다. 백설기를 덮어 놓은 세상에 만리장성, 숭례문, 만화 캐릭터 등 환상적인 작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조각가의 살아 숨 쉬는 혼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그 위에 또 다시 눈발이 하얀 떡고물처럼 흩어져 내렸다. 가정이라는 둘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졌고 새로운 곳에서 문학을 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은 휘날리는 눈과 더불어 하늘로 날아오르게 한다. 눈밭에 뒹굴다보니 머릿속이 포맷한 것처럼 백지가 된다. 그 위에 나만의 추억을 하나하나 스케치한다. 세월이 흘러 태백을 떠올리면 스케치한 그림이 파노라마로 떠오를 것이다. 추억의 창고가 차곡차곡 채워져 알부자가 된 것 같다.

오후 5시경 철암역을 뒤로한 채 기차는 온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한다. 여행사 직원이 음악을 틀겠다고 안내멘트를 하자마자 트로트 메들리가 쏟아진다. 잔잔한 경음악이나 겨울가요려니 한 기대가 깡그리 무너진다. 아줌마 부대가 여기저기에서 일어선다. 볼그댕댕한 얼굴을 보니 기분 좋게 술도 한잔씩 한 모양이다. 처음에는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더니 금방 기분이 고조되는지 막춤 판이 벌어진다.

꽃놀이를 다녀 온 관광버스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던 꽃무늬 블라우스의 어머니가 어슴푸레 떠올랐다. 알듯 모를 듯 동네 어른들과 좁은 버스통로에 어우러져 흐느적거리는 어머니의 모습은 내가 여태 보아온 단아함과 거리가 멀었다. 꽃무늬 옷보다 더 발그레한 얼굴과 마주치자 내가 더 부끄러워 외면해 버렸다. 내 나이 불혹을 지나고 보니 그때 어머니를 이해 할 것 같았다. 일 년에 한두 번 가는 야외놀이가 일상의 무거운 짐을 잠시라도 내려놓는 어머니의 숨구멍이었던 것이다. 나의 외면은 어머니를 내 틀에 가두고 이런 어머니가 되어 달라는 욕심이었다.

몇 년 전 친구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제주도 여행을 간적 있다. 패키지 여행이라 자유시간이 없었다. 죽이 잘 맞는 친구들과의 시간이라 관광가이드의 말을 뒷전으로 할 때도 많았다. 그럴 때 마다 아이들이 어른들을 이끌었다. 추억의 거리에 들어서 관광을 하는데 디스코 음악이 흘렀다. 흥에 겨워 주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친구들과 고고에 막춤까지 추었다. 아이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쳐버렸다. 그때 아이들의 마음이 내가 예전 엄마가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춤을 추던 모습을 볼 때 같았으리라.

눈꽃열차의 6호 객실은 알고 보니 나이트클럽과 같은 곳이다. 우리 일행 중에 몇몇이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흥을 돋운다. 나도 모르는 손에 이끌려 시늉만 내다 앉아버렸지만 딱히 싫지는 않다. 처음엔 낯설어 어색했지만 함께 박수를 쳐다보니 나도 흥이 나기는 한다.

어둠이 내리자 차창에 비치는 그들의 모습이 왠지 애처롭다. 지치지 않는 저 몸짓은 아마도 꾹꾹 눌러 둘 수밖에 없었던 한 생의 말 못한 이야기일 것이다. 생전 어머니가 그랬듯이 일상에서 벗어나자 몸의 언어로 한꺼번에 터져버린 불덩이 아닐까. 자유에 대한 갈망이 평상시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춤으로 이어졌으리라. 내 몸에 자연스레 배여든 억눌린 여성성에 공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관객으로 있는 내 모습이 어설프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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