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포항출신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학생모임 심맥회가 있었다. 66학번 선배들이 1기인데 우리는 기(期)라 하지 않고 맥(脈)으로 불렀다. 한 기수별로 10명 정도 회원이 가입했고 이후 13맥까지 이어져서 회원이 130여 명에 이르기도 했다. 필자는 7맥이다.
필자가 대학 1학년 즈음에 회원들은 한달에 한번 서울 동숭동 중국집에서 주로 만났다. 고향을 떠난 선후배가 모여 향수를 달래며 술잔을 기울이던 옛 추억이 새삼스럽다.
1970년대 초 여름이면 송도해수욕장 백사장 청소 등 봉사활동을 하고, 방학때 중학교에서 과외수업 지도를 해오다가, 1973년 겨울 우리는 포항에서 순수 학생들로써는 최초로 연극공연을 개최했다. `수업료를 돌려주세요`라는 연극이었는데 기획, 연출, 출연 등 모두 심맥회원이 맡았다. 생전 연극이라곤 처음 해보는 초보들이 한달 이상 대본을 들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밤 늦게까지 혼신을 다해 드디어 생애 첫 공연을 했으니 얼마나 긴장되고 떨렸을까? 공연 무대에 오를 때 난생 처음 분화장을 하고 빌려온 양복을 헐렁하게 입고 연기하면서 서로를 보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당시 포항문화원(지금의 경찰문화센터) 강당에서 공연을 했는데, 다행히 수백명의 관객이 좌석은 물론이고 통로까지 꽉 차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준비한 회원들도 스스로 놀라 행사를 정말 잘 했다며 안도했다. 경비는 포스코를 비롯한 지역 기업체, 인사들의 도움과 약간의 자체 재원으로 충당했다. 공연에 참여했던 회원들이 공연이 끝나고 뒷풀이를 하는데 어린마음에 그 허전함을 이기지 못해 한밤중에 송도해수욕장을 배회하던 그날 기억이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이후 심맥회는 3~4년에 걸쳐 `여우`라는 연극을 한차례 더 하고, 음악회도 수차 개최했는데 당시 시민회관(현재 중앙아트홀)과 죽도동 국제극장 등을 이용했으며, 가곡공연에는 엄정행, 김원경, 김청자 교수 등이 출연했고, 국악공연에는 조상현, 조통달 선생 등이 출연했다. 당시 서울음대 성악과에 다니던 6맥 박정하 선배(전 나사렛대 교수)의 활약이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음악회 역시 관객이 넘쳐 대성황을 이뤘다.
심맥회는 당시 회지(會誌) `심맥`도 제작, 발간했는데 회 소식과 회원들의 시, 수필 등 문학작품 및 회원동정 등을 실었다. 당시 철필(鐵筆)로 쓴 인판지를 등사해 일일이 제본해 만들었다. 오직 회원들의 열정으로 잡지발행까지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후에는 회원들의 군입대가 잇따르고 사회진출이 늘어나면서 그런 활동이 계속 이어지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지만, 지금도 60여 명의 회원들이 포항과 서울에서 각각 모임을 이어가며 일년에 한번 합동 모임도 하고 있다.
현재 포항회장은 1맥 남성규 (주)진영산업 대표이사이고, 서울회장은 3맥 이균호 전 동부화재 부장이다. 회원들은 사회에 진출해 각계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해오고 있다.
회원 몇 분을 소개하면 1맥 문충배(전 포항사랑병원장), 손민(동해기연 사장), 김해규(서울 진주약국 약사), 2맥 오임상(전 서울대 교수), 3맥 고 권종락(전 외교부 차관), 오창록(정형외과 전문의), 4맥 이희달(전 산업은행 부행장), 정용호(화일약품 부사장), 5맥 김용길(고대교우회 포항지회장), 문대성(전 인천대 교수), 배영철(징콕스코리아 사장), 6맥 금태환(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장 겸 포항뿌리회장), 김진오(전 광주고검 부장검사), 7맥 박승대(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박정찬(전 연합뉴스 사장), 황영명(효산출판사 대표), 8맥 조병현(서울고등법원장), 김철구(전 포항MBC 보도제작국장), 9맥 이석철(천일가스 사장), 도성환(홈플러스 사장), 10맥 백남도(전 포항시 자원봉사센터 이사장), 11맥 문충도(일신해운 사장) 등이 있다.
지금은 어느덧 황혼을 바라보는 회원들이 40여년 전 고향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해 애쓰던 젊은 시절은 생각만 해도 흐뭇한 추억으로 가슴에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