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만 믿으라고 곧잘 말들 한다. 하지만 그 말조차 믿을 게 못된다. 있는 그대로의 기준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그 무엇은 본성 그대로의 형상과 내용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개별자의 눈에 비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다. `있는 그대로` 라는 의미는 현실에서는 `개별자가 본 대로`가 되기 일쑤이다.
이런 철학적 사유를 깊이 있게 파고든 소설이 `파이 이야기`이다. 얀 마텔의 유머 감각에 한 번 빠지고, 단순하고 쉬운 문체에 두 번 넘어가고, 진중하고 의미심장한 주제에 세 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작품이다. 소년 파이의 태평양 표류기랄까. 인도의 한 도시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네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되고 이참에 팔린 동물들과 함께 화물선에 오른다. 배는 난파되고 가족 중 파이만이 살아남아 벵골호랑이와 망망대해에서 표류동거를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에피소드들을 삶의 철학에 빗대 풀어 놓았다. 삶의 방식과 종교 문제 및 인간의 본성 등, 살면서 느낄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도마 위에 오른다.
비현실적인 파이의 후일담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의심을 감안해 파이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버전으로 등장인물들을 각색해 능청을 떤다.“어느 쪽이 더 나은가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인가요,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인가요?” 밝은 모습으로 말하는 파이의 유머가 슬퍼 보이는 건 왜일까. 세상엔 너무 많은 진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별자 숫자만큼의 진실을 믿고 싶어 하는 한, 파이의 유머는 단순한 유머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