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히 먼 곳을 그리며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보였다가 사라지거나, 세월 농익은 어느 날 손에 잡히기도 한 실상이기도 하였다. 꿈을 꾼다는 것은 화창한 봄날 가로수를 따라 걸을 때 마른 가지를 헤치고 돋아나오는 잎들의 속삭임을 듣는 마음이다. 신록의 희망이다.
중학교 음악 시간에 한 노래를 배우면서 달빛 출렁거리는 콜로라도의 풍경을 꿈꾼 적이 있었다. 세월인가, 그 곳이 어느 날 내게로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눈 덮인 산맥의 꼭대기, 청람 빛 하늘과 산봉우리가 맞닿은 그 곳에 보름달이 시린 얼굴로 떠 있다. 소복인 듯, 눈옷을 입은 나무숲은 태고의 설경을 그린다. 로키의 산자락 콜로라도의 계곡에 겨울이 빙하로 내렸다. 달이 가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천연의 풍경을 사진에 담아내던 사진작가 존 필더(John Fielder)의 콜로라도 풍경사진이다. 날마다 조금씩 변하는 자연의 신비가 작가의 눈에 포착되어 사진 속에 담겼다. 새롭게 창조되는 자연의 순간들이다.
그는 평생을 콜로라도의 산, 들, 바위, 숲, 호수의 빼어난 풍경을 사진기에 담고, 연말이 되면 12장의 사진을 골라 작품달력을 만들어 선보인다. 그 지역의 가이드북을 제작한 것은 더 오래전이었다. 그는 사진작가이자 교사이며 출판업, 환경보호, 청소년 환경체험 등 지역의 자연을 지키는 환경운동가라고 소개한다. 생애의 사명으로 자연 사랑을 완성해가는 길을 걷고 있는 분 같다. 그의 간절한 바람이 렌즈를 통과해 혼을 지닌 예술작품으로 태어났을 것이다.
작년에는 이 달력 제작 30주년 기념으로 그 동안 선보인 수작들 55편을 골라 주간 약속달력(Engagement Calendar)을 펴냈었는데, 올해도 두 종류를 함께 받았다. 약속메모나 간단한 일기를 쓸 수 있게 페이지를 편집해 놓았는데 나는 단 한 칸에도 글씨를 쓸 수 없었다. 한 해의 여행으로 잠시 지나가며 느끼는 즐거움보다 오래도록 그곳의 비경을 소유하는 행복을 누리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스물일곱 해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함없이 성탄과 새해 벽두에는 이 기쁨을 누린다. 산타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좋아하다가도 문득 살아가면서 이웃에게 이런 기쁨을 준적이 있었던가를 돌아보게 한다. 채우지 못하고 헐렁하게 보낸 시간의 조각들을 주워 담듯이 못다한 일들을 열 두 장의 갈피에다 차곡차곡 챙겨 둔다.
발신인은 어린 시절 단짝이었던 친구의 언니.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5년 연상의 중학생이었는데, 공부도 뛰어났지만 늘 문학서적을 애독하였고 입담 좋게 우리에게 전하기를 즐겨하였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유럽을 거쳐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정착한 후에도 관심 분야의 공부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50대의 나이에 톨스토이 작품을 원서로 읽겠다고 러시아에 어학연수를 다녀올 만큼 열정과 용기와 결단력이 대단한 분이다. 대학 입학선물로 영문판 `북경서 온 편지`를 보내주었고, 김춘수 시인의 시에 대하여 진지하게 이야기해준 적도 있었다.
젊은 시절, 유럽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내왔을 때에도 고색창연한 문화와 세계명작의 배경이 되었던 곳들을 꿈꾸게 했다. 여행의 바람이랄까, 출발의 동기를 강하게 심어준 그분은 일흔이 넘은 지금도 로키의 하이킹과 낯선 곳의 여행을 즐긴다고 한다. 인생을 스스로 제단하고 자신의 것으로 다스리며 살아가는 삶으로 마지막까지 나에게 도전을 주문하는 선배이다.
로키산맥을 넘어 서부로 향하던 개척자들에게 안식과 희망을 주던 대자연의 품, 콜로라도 강물 위에 비치는 달과 철따라 피어나는 꽃들이며 푸른 숲을 만날 꿈은 오랜 세월을 이어 온 노래였다. 내일이면 늦을까.
넉넉한 대지를 바라보며 살아온 세월을 선물한 이에게 간절하도록 고마운 마음을 띄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