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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

등록일 2014-12-26 02:01 게재일 2014-12-2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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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숙수필가·농부
장갑을 잃어버렸다. 겨울이면 애지중지 손에 붙이고 다니던 장갑이다. 손가락 마디마디, 불어 닥친 칼바람도 막아 주고 흰 눈이 펑펑 오던 날 눈을 맞아도 따뜻하게 감싸주던 것이다. 갈색 앙고라 손가락장갑은 색깔도 튀지 않고 무난했다. 장갑은 내가 가는 곳 어디든지 나의 손과 함께 동행 했다.

겨울이 깊어갈 때 추위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쪽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농사를 짓는 나는 여름에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일을 해야 하지만 농한기인 한겨울은 내 손도 휴식의 시간이다. 여름 내내 거칠었던 손은 겨울이면 하얗게 꽃이 피는 시기이기도 하다.

집에서 공항까지 장갑을 끼고 출발을 했었다. 일주일간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여행 하고 며칠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장갑을 찾았다. 가방 속 여기저기 있을 곳을 다 뒤져봐도 장갑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추위에 몸부림치는 내 손은 허허 벌판에 서 있었다. 무말랭이처럼 오그라지고 쭈글쭈글한 모양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녔지만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다.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사연이 있는 장갑을 잃어버려서 올겨울 내내 나는 아쉽기만 했다.

지난 해 연말이었다. 오랜만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날씨가 추운데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 전화였다. “올 겨울은 어떻게 보낼래?” 친구는 겨울만 되면 나의 손 걱정을 했다. 나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손바닥에 껍질이 벗겨지고 피가 통하지 않아서 장침을 맞을 때가 있었다. 침을 맞은 자리는 시퍼렇게 멍이 들고 얼룩이 졌다. 친구가 그 손을 본 후부터는 은근히 걱정이 늘어졌다.

사실 그 친구는 남의 걱정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의 남편은 몇 년 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직금과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사업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마저 궁색해졌다. 한 달 벌어서 한 달 먹고 사는 처지가 현실이고 보니 그녀도 돈벌이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동안의 호시절은 다가고 식당에서 맨손으로 설거지를 해야 하고 음식도 만들어야 했다. 공장에서 먼지를 덮어 쓰고 양말을 뒤집는 작업을 정리해서 거래처에 납품을 하고 마트에서도 무거운 물건을 들어 날라야 했다. 그렇게 험한 일을 하면서도 그녀의 손은 언제나 부드럽고 따뜻했다. 나는 그녀를 만나면 손부터 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은 감촉이 아주 좋았다.

그런 그녀가 잠깐 만나자고 했다. 근무 시간인지 가운을 입고 있는 그녀는 백화점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내가 뭐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달싹거렸다. 함박눈이 펑펑 오던 날 나의 거친 손이 생각나서 장갑 한켤레를 샀는데 이제야 연락을 한다고 했다.

커피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그녀는 봉투 속에 든 갈색의 장갑을 꺼내더니 내 손에 끼워줬다. 남은 한쪽마저 끼고 나니 따스한 온기가 장갑 속에 가득 찼다.

그녀에게 힘을 내라고 내가 격려를 해 줘도 시원찮을 텐데 추위를 많이 타는 나를 위해서 그녀가 오히려 내 손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로부터 받은 선물을 흔적도 없이 잃어버렸으니 어찌 마음이 상하지 않겠는가.

그녀의 남편이 회사를 그만 두었을 때 마주한 술 잔 앞에서 그녀의 얘기를 몇 시간 째 들어줬다. 평이했던 삶 속에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이도, 속내를 너나들이 할 수 있는 친구도 없었다고 했다. 소주 한 병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주거나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새 반병을 더 마신 듯 했다. 그러면서 가까운 친구로 남았고 오랫동안 소식이 없다가 만나도 우정을 나누는 한결 같은 사이가 되었다.

눈이 펑펑 내린다. 겨울의 한 복판에 서 있는 듯하다. 평생을 살면서 마음이 서로 통 할 수 있는 친구가 셋만 있으면 성공한 삶이라고 한다. 나에게는 몇 명의 친구가 있는지 주변을 둘러본다. 그들에게 얼마만큼 따스한 손이 되었는지 갸우뚱해 본다. 마음을 열어 놓고 이렇게 대화가 통하고 아껴주는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니 칼바람의 찬 겨울이 춥게 느껴지지 않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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