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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라는 윤색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4-10-24 02:01 게재일 2014-10-2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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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디얇은 꽃잎이 겹겹이 쌓였다. 한 송이에 무려 삼백 여장의 꽃잎이 피어난단다. 미나리줄기 같은 연한 꽃대에 꽃받침마저 바짝 붙어 있어 담백하기 그지없다. 꽃잎이 휘돌아간 매무새는 장미를 닮았고, 활짝 핀 꽃잎이 겹겹이 벌어지는 모양새는 국화를 닮았다. 우아하기로는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백합과 수국 옆에서도 전혀 기품이 달리지 않는다. 습지꽃 라넌큘러스를 두고 한 말이다.

내 멋대로 그 꽃을 `기억꽃`이라 부른다. 음지나 습지의 기억일수록 잘 살아난다. 개구리란 뜻의 `라이나`에서 유래한 라넌큘러스는 이름에 걸맞게 습지와 연못을 좋아한다. 수 백 장의 꽃잎마다 수 백 가지의 기억을 지닌 꽃. 한 두 잎으로 시작해 자꾸만 부풀어가는 습습한 기억들. 한 잎 한 잎 아픈 기억을 보듬고 돌보는 과정에서 가공되고 늘어난 꽃잎들. 꽃말조차 매력, 매혹, 비난이 아니었던가.

매혹과 비난은 이음동의어이다. 매력은 시선과 시샘을 동시에 얻는다. 매혹과 비난의 꽃말이 같은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마치 팬을 많이 거느리는 연예인일수록 안티 팬도 많은 것과 같다. 수 백의 잎으로 피어나는 낱장 하나하나마다 다른 기억의 조각보를 지닌다. 인간의 기억은 예민한데다 부서지기 쉽다. 상처와 악의의 기억은 영광과 선의의 기억보다 깊고 오래간다. 따라서 상처나 악의가 더 깊어지기 전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조작하고 왜곡한다.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진실을 본다고 그것이 언제까지나 진실로 남아 있지는 않는다. 우리의 기억은 보고 싶은 대로 가공하고 윤색한다. 본 것을 기록하는 게 아니라 봐야 했던 것만 기록한다. 남 보기 좋은 게 아니라 나 보기 좋으라고. 조각보 같은 꽃잎이 모여 한 송이 꽃이 되고 정원이 되고 들녘이 된다. 라넌큘러스 꽃잎이 벌어진다. 잎 얇고 빛 고운 저 기억의 꽃잎들, 한 장 한 장 보듬는다. 죽은 꽃잎은 떼어내고, 덜 핀 꽃잎은 여며준다. 각각의 틀에서 재편집되고 수정되는 연민 서린 꽃잎들, 그렇게 기억의 꽃송이는 피고 진다.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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