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이석수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7>
큰일을 치르다보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이 있기 마련이다. 포항종합제철도 건설과정에서 숱한 일화를 남겼는데 그중 몇 가지만 소개한다. 1967년 7월 종합제철의 입지가 포항으로 확정되면서 건설부의 첫 번째 업무는 포항공사사무소 설치였다. 필자는 당시 건설부 포항현지 창구 역할을 맡았기에 포항공사사무소를 구하는 일에 매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부적으로 정한 사무실 규모는 100평 내외. 포항시내에 위치해야 하는 조건이 달렸다. 문제는 당시의 포항 여건으로는 그만한 사무소를 구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100평이 넘는 평수를 가진 건물이라고는 현재의 포항소방서 2층이 유일했던 것이다.
필자는 집안 어른들은 물론 지역의 모든 요로를 총동원하는 방법으로 소방서를 설득했다. 처음엔 완강하던 소방서 측도 `국가 사업`이라는 명분을 들이대자 사무실 이용을 허용했다. 일 할 공간이 마련되자 관련 업무가 쏟아졌다. 필자를 포함, 영일군은 무수한 잡무들을 처리하느라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그러나 모두들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했다. 건설부 포항창구에서 일한다는 자부심도 컸기에 힘든 줄도 몰랐다.
필자가 당시 정열을 쏟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직업관도 있었지만 우리나라 기간산업인 종합제철이 고향에 세워진다는 기쁨이 더없이 컸고, 종합제철이 고향에 안겨줄 미래가 너무나 희망적이어서 그에 따른 신명이 남달랐던 것. 자랑하자면 필자는 포항에 내려 온 건설부 직원들로부터 `이석수를 통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는 과분한 호평을 받기도 했다.
편입지역 보상과 강제철거 과정에서 지주들과의 마찰로 인한 일화들도 많다. 영일군은 편입에 반발하는 지주들에 맞서 포항시내 학생들을 동원하여 한창 자라고 있는 보리를 모조리 베어 버리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관의 밀어붙이기가 본격화되자 그에 비례해 저항도 매우 강했다. 일부 편입주민들은 강제철거에 나선 불도저 앞에 누워 “나를 죽여라”고 극렬하게 맞섰고, 몇몇 노인들은 조상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며 안방에 앉아 끝까지 버티는 등 진통이 매우 심했다.
부자간에도 심하게 충돌한, 기가 막힌 경우도 있었다. 당시 편입지역에 고향을 두었던 경북도청의 모 간부는 자신의 고향집에 체인을 걸어 불도저로 잡아당기는데, 그의 부친은 지붕으로 올라가 아들에게 호통을 치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제1고로 위치 선정 비사도 기억이 새롭다. 가장 중요한 시설을 어디둘 것인지 고민을 거듭했지만 결론 도출이 안되자 결국 풍수를 보는 지관들을 동원했다. 지관들이 찍은 곳은 송정동 수녀원 쪽과 공동묘지중 모 문중의 명산 묘역. 마지막 선택도 끝내는 지관들이 했는데, 수녀원 쪽이 낙점됐다. 이곳은 형산강 하구와 너무 가까워서 강줄기를 북쪽으로 돌려야 하는 난제가 있었지만 그대로 추진됐다. 제1고로 위치로 선정된 수녀원은 해방 전에는 일본군 연대 급 군영이 주둔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는 동지상업중학교가 태동한 곳으로, 1947년 학교가 죽도동(현재의 한일아파트)으로 이전하면서 천주교 측이 매입했는데, 지관들은 그 곳을 길지로 꼽았다.
현재의 포항제철소 중앙도로 부근에 자리 잡고 있던 당산나무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 일화이다.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 주민들도 이 당산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기며 매년 제사를 올렸고, 당산나무를 훼손하는 사람은 재앙을 받아 죽는다고 믿고 있었다. 이런 미신을 들은 인부들은 아무도 당산나무 제거작업에 나서지 않았다. 현지에서 당산나무를 제거할 인부를 찾는 노력은 허사가 되면서 결국 당산나무는 맨 나중에 제거하기로 결정되었다. 필자는 당시 궂은 일을 도맡아 했던 터라 종국에는 당산나무 제거 임무도 떠맡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포항에서는 그 나무를 베어 낼 간 큰 선수를 구할수 없다는 것. 그때 강원도 평창에서 목상을 할 때 알게 되었던 인부 2명이 떠올랐다. 그들을 찾는 것 자체가 쉽지않았지만 수소문 끝에 알이낸 후 당산나무를 좀 제거해 달라고 읍소했다. 나무를 베어 낼 선수를 구하자 이번에는 당산나무 제거작업을 함께 해야 할 불도저 기사가 나서지 않아 애를 먹었다. 이 일은 결국 불도저 기사가 재앙을 받아 사망할 경우 포항제철에서 가족에게 보상한다는 약속을 한 후에야 성사시킬 수 있었다.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당시 장기영 부총리는 포항종합제철 기공식 참석을 위해 포항으로 오던 도중에 자신의 해임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장 부총리는 이에 개의치 않고 기공식에 참석하여 “개천개지한지 4천200년 만에 우리나라 최대의 제철공장을 5개국 차관으로 건설하게 되었으며, 종합제철의 성패여부가 곧 2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의 성패를 가름하는 만큼 강철 같은 책임감과 철석같은 단결로 이를 성취해 달라”는 요지의 치사를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