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관세화`는 말 그대로 쌀을 수입할 때 관세를 내는 것이다. 2차 대전이 종료되자 세계 각국은 자유무역을 촉진해 경제번영을 꾀하고자, 교역규모가 크지 않은 농산물과 서비스 부문을 제외한 공산품의 관세율 인하에 초점을 맞춘 7차례의 다국간협상(GATT)을 벌여왔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 공산품 외 분야의 교역비중이 크게 높아지자 농산물, 서비스, 지적재산권 등을 포괄하는 다자간 협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마침내 1994년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에서는 세계무역기구(WTO) 설립과 함께 모든 농산물에 관세를 매겨 교역을 투명하게 하자는 원칙이 마련되었다.
당시, 수출주도의 급속한 공업발전을 추진해온 우리나라는 농산물시장의 국제경쟁력이 지극히 낙후되어 쌀 시장 개방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했기에, 우리 민족의 피요 살이요 혼이며 문화인 쌀만큼은 결코 개방할 수없다고 버티었으며 결국 개발도상국으로서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아 10년간(1995~2004년) 쌀 의무수입량(MMA)을 수용하고 나머지 농산물의 예외 없는 관세를 받아들였으며 2004년에는 다시 10년간(2005~2014년) 관세화 유예를 연장하였던 것이다. WTO회원국 중 아직까지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과 필리핀 뿐이다.
20년간 쌀 관세화 유예를 택한 일종의 패널티로 외국쌀 의무수입량은 매년 2만t씩 늘어났으며, 올해는 경기도 전체 쌀 생산량과 맞먹는 40만 9천t이나 된다. 우리나라가 2015년 이후 관세화 유예를 또 하게 되면 가뜩이나 쌀 소비가 줄고 있는 상황에서 쌀 의무수입 물량을 더 늘려야 하기 때문에, 국내 쌀 UR협상에서 정한 국내 쌀과 수입쌀 가격의 차이를 기준으로 높은 관세율을 유지하여 시장을 개방하는 것이 의무수입량을 늘리는 것보다 유리하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인 것이다.
우리나라보다 먼저 쌀을 관세화한 일본은 800%라는 고율관세로 수입쌀은 거의 없고 오히려 일본쌀이 동남아 지역으로 수출되는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쌀 관세화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온 지금, 정부는 쌀 재배 농업인의 소득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쌀 고정직불(쌀 재배농가에게 쌀값 등락과 관계없이 12월 1헥타르(3천25평)당 90만원의 고정직불금 지급), 쌀 변동직불(정부가 고시하는 목표가격과 수확기 산지 쌀값 차이의 85퍼센트에서 고정직불금을 차감한 금액, 익년 3월 지급), 재해보험 등 소득 안정장치를 보완해 나가며 또 쌀 생산기반 정비, 기계화 등 쌀 전업농 육성, 수입쌀 혼합판매금지로 부정 유통을 방지할 계획이다.
포항시에서도 지역 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친환경재배단지 확대, 들판공동체 육성, 경영비 절감을 위한 직파재배 확대보급, 농기계 및 농자재 지원 확대, `영일만 친구`로 브랜드화와 직거래장터 개장, 친환경 학교급식 등의 사업을 추진하여 쌀관세화 전환에 만반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쌀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식량이 아니라 우리 농촌의 근간이며 우리 농부들 나아가 우리 민족의 뿌리깊은 정체성이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어려운 난국들을 대동단결(大同團結)하여 밥심으로 극복해 왔다.
쌀을 뜻하는 한자 미(米)는 쌀 한 톨을 얻기까지 농부의 손길이 무려 88(八+十+八)번의 손길이 필요함을 표현한 회의문자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또, 안부를 물을 때 “식사 하셨어요?” 라고 물을 정도로 한국인에게 밥은 먹고사는 문제, 생명, 인생의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인고의 시간을 거쳐서 밥상으로 올라 온 한 톨의 쌀의 소중함과 사시사철 수고로운 농부들의 신성한 노동에 찬사를 보내자.
쌀 관세화라는 또 다른 파고 앞에 국익에 도움이 되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