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예는 스스로를 두고 한 말이다. 절대 완벽주의자가 못 되는 나는 스스로를 위로할 필요가 있을 때 그렇게 위로한다. 실천력이 따라주지 않을 때 우리가 둘러대는 핑계가 바로 `완벽주의론`이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곧장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혹시 불어난 몸피가 살이 아니라 붓기일 수도 있으니 병원부터 가야할 핑계가 남았고, 쓰다 만 단편을 완결 짓지 못하는 것은 아직 내 문체가 원하는 만큼 완성도가 높지 못하니 될 때까지 다른 작품을 더 읽고 준비해야할 이유가 기다리고 있다. 진실로 진실이 아닌 핑계를 갖다 붙인다. 게을러서 실행 못하는 것을 마치 완벽주의자여서 그런 것처럼 포장할 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미흡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작이 반이다` 라는 속담이 서두의 두 속담보다 훨씬 실용적이다. 아는 길은 곧장 가면 되고, 얕은 내는 가벼이 건너도 무관하다. 아는 길에 괜히 허비할 시간은 행동으로 옮기는 데 쓰고, 얕은 내를 건너는데 소비한 과도한 에너지는 심오한 창의력에 할당하면 된다. 이 세상에 완벽함은 없다. 완벽을 추구한다고 해서 완벽해지지도 않는다. 미완이고 어설프지만 일단 시도하는 게 완벽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백만 배는 낫다.
모든 완성은 불완전에서 출발한다. 완벽하게 준비한 사람이 끝낸 일보다 불완전한 상태에서 시도한 사람이 끝낸 일이 더 많다. 완벽한 사람은 시작한 일 자체가 드무니 성공할 확률도 낮을 수밖에 없다. 완벽주의연함은 완벽에 이르는 가장 나쁜 포장술이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