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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는 차별 아닌 구별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4-08-20 02:01 게재일 2014-08-2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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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가 없으면 소통의 필요가 없다고 아렌트가 생각한 것은 옳았다. 차이가 없다면 말과 행위도 필요 없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 우리 모두 똑같다면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앞 부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홀로코스트 전범 중 한 명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취재기인 이 책은 대중성과 흥미를 갖추었음에도 쉽게 읽히지 않는다. 당시 유럽이 처한 정치적 환경과 아렌트가 추구하는 철학적 배경에 대한 독자로서의 지식 부족 탓도 있고, 내용 및 용어 등에서 매끄럽지 못한 번역에도 어느 정도 원인이 있다. 그럼에도 밑줄 긋기 할 곳이 많은 건 전적으로 아렌트가 발하는 통찰 덕이다.

크고 작은 갈등의 바닥엔 `차이를 인정하지 못함`이라는 인간의 기본 성질이 깔려 있다. 욕심은 갈등을 낳고, 갈등은 차이의 불인정에 기인한다. 한나 아렌트의 생각처럼 인간에게 `차이`라는 게 없으면 `소통`도 필요치 않다. 같은 생각 같은 모습, 즉 모든 인간이 내외적으로 획일화 되어 있다면 갈등도 소통도 애초에 없는 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갈등과 소통 이전에 모든 답이 똑같아 버리는 현실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따라서 갈등하는 인간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갈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소통이 문제이다. 잘 소통하려면 차이를 인정해야 하고, 차이를 인정하려면 `타자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범죄를 저지르고도 무감각했던 아이히만의 가장 큰 문제는 `차이`에 대한 무지였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에 의하면 악한 게 아니라 그저 `특별히 천박했던` 아이히만은 사유도 의지도 판단도 할 수 없었다. 타자의 관점에 대한 학습에 노출될 기회가 없는 만큼 악의 평범함에 길들여졌다고 할 수 있다.

차이란 차별이 아니라 구별을 의미한다. 너와 나를 차별해도 좋다가 아니라, 너와 내가 다름을 구별하고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타자의 관점을 훈련하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악의 평범성에 감염될 수 있다는 무서운 가르침!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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