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서울의 한 사립대학 한 학과의 홈커밍데이에 참석했다. 필자가 30여년전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조교수로 재직해 학생들을 가르쳤던 대학이었다. 그 시절은 필자도 20대 였기에 학생과 교수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학생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교육과 연구를 하던 시절이었다.
옛 제자들도 이젠 50대에 접어들어 사회 요소요소에서 활약 중이었고 희끈희끈한 머리가 이제 스승이었던 필자와 함께 나이가 들어가는 모습이 감개 무량 했다. 국내의 유명한 대기업의 부사장으로 있는 제자와 함께 이 모임을 참석하면서 정말 정겹고 보람된 시간을 가졌다.
참석한 시니어 제자들이 학생 후배들에게 사회 경험과 사회진출의 준비들을 설명하고 인생의 나침반 같은 교훈적인 이야기를 할 때 그들은 멋진 든든한 모습이었다.
이 대학은 오랜 역사와 전통으로 자리잡은 사립대학으로 교육이 충실하고 인성교육이 훌륭한 대학으로 명성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30여년전 그 시절의 대학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달라진 캠퍼스, 달라진 대학생활을 보여주고 또한 달라진 커리큘럼 등도 설명하면서 나름 대학생활에서 갖춰야 할 덕목 등을 이야기 하면 흔쾌한 시간을 가졌다. 모임은 근처 식당으로 이어져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재학생, 졸업생 100여명의 참석자가 식당을 꽉 메우고 시끄럽긴 하지만 즐거운 저녁식사가 이어졌다.
그러던 중 좌석에서 해당학과 현직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해할 수 없는 대화가 오고 가게 됐다. 이 전공분야에서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금융공학을 가르치냐는 필자의 질문에 그 교수는 가르쳐야 하지만 안가르친다고 했다. 왜냐고 물어보는 나의 질문에 금융계는 매우 폐쇄적으로 아주 제한된 소수의 대학 졸업생만 받아들이기 떄문이라는 황당한 답을 내놓았다.
필자의 당황스러움은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됐다. 물론 제한된 분야이긴 하겠지만 졸업생들이 대기업의 임원으로 진출해 크게 활약하고 있는 유명한 중견대학인 이 대학이 이런 상황이라면 소위 중소대학이나 지역대학(지방대학, 필자는 지방대학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은 이보다 심한 사회진출의 문제를 안고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대학교수들도 대학이 지방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중앙정부 자문과 정책참여에 여러가지 차별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필자가 미국대학 교수시절 워싱턴에서 수천km 떨어진 도시의 대학교수 였지만 중앙정부 정책참여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사실상 스탠포드, 버클리, 칼텍과 같은 대학들은 워싱턴에서 비행기로 4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에 있지만 미국정부의 정책 등의 자문에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있다.
인재에 대한 차등은 학생, 교수 모두 광범위하게 차등 적용되는 것이 한국적인 현실이다. 사실 정부는 그동안 지방대학 특성화사업, 지역대학 할당제, 지역 인재 우대정책 등 줄곧 관련 정책을 발표해왔다. 이러한 정책에 환영과 찬성을 보내고 싶다.
그러나 강제적으로 실시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정책은 사실상 우리의 자화상이다. 근본적으로 사회에 퍼져있는 편향된 인식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이러한 정책들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성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개인적으로 `지방대학`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세계지도를 들여다 보면 한반도는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 점 왼쪽에 있으면 어떻고, 점의 오른쪽에 있으면 어떤가? 글로벌 시대에서의 지방대학이란 말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그렇다면 서울 중심의 사고방식은 기업의 채용방식에서부터 바뀌어야 한다. 중소 도시에 위치한 지역대학들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번거롭지 않고 쾌적한 삶의 환경 때문에 학생들의 학업과 교수들의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대학교육 선진국인 미국의 경우 좋은 대학들이 중소도시나 도시외곽에 있는 경우가 흔하다.
이제 우리는 간판이나 지역 보다는 능력이 우선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정부, 기업이 능력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사회는 결국 선진국으로 가는 사회의 전제조건이다.
이 조그만 나라에서 어디가 서울이고 어디가 지방인가. 이 미국의 한 주보다도 더 작은 나라에 무슨 지방대학이란 말이 필요한가? 이젠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