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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재벌이 딸 `유순이`를 찾습니다

등록일 2014-05-12 02:01 게재일 2014-05-1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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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3주 전에 터키의 이스탄불을 다녀왔다. 인구 약 7천 명, 면적은 남한의 7배가 넘는 동서양을 잇는 아름다운 나라이다. 현지에서 들은 터키군의 한국전 참전으로 일어난 슬픈 사연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한국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되었건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터키 땅에서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1951년 후반 터키 군 1만5천명이 한국 땅에 파견된다. 당시 터키는 미국, 영국, 프랑스에 이어 4번째 많은 병력을 한국전선에 파견한다.

최근 한국인들 중 터키를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동서의 길목 아름다운 터키를 여행하기 위함이다. 터키인들은 어딜 가나 한국인들을 좋아하고 환영하고 있다. 내가 만난 터키인은 우리 한국인들을 `피를 나눈 형제`라는 뜻으로 `칸카르 데쉬` 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를 `코렐리(Koreli)`하면서 반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전에 참전한 용감한 터키군은 금양장리 전투에서 중공군에 대항하여 많은 전과를 거둔다. 터키군 장교 유습(Joshep)이 소속된 부대도 경기도 북부 전선에서 피나는 전투를 치른다. 총성과 포탄이 뒤범벅이 된 전쟁터에서 소대장 유습은 전쟁의 참담함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청년 유습은 엄청난 전쟁의 비극과 남으로 이어가는 피난 행렬을 목도한다. 이 전투에서 터키군 1천131명이 전사하고, 407명은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시신중 상당수가 아직도 부산 UN 군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1952년 경기도 북부 전선에서 터키군 청년 장교 유습은 피를 흘리면서 쓰러진 어느 소녀를 목격한다. 제 몸 하나 피하기 힘든 전쟁터이지만 동정심이 많은 유습은 그 소녀를 살리기로 결심한다. 유습은 이름도 모르는 피투성이가 된 이 소녀를 자신의 수건으로 지혈시켜 등에 업었다. 유습은 중대 부대 의무소에 그녀를 남겨두고 다시 전선으로 떠난다. 부대 이동이 있을 때 마다 유습은 한국 처녀 `순이`를 정성으로 돌보게 된다.

전쟁터에서 만난 유습과 순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 싹튼다. 전쟁터에서 부모마저 잃어버린 순이가 오직 의존할 곳은 오직 이국 청년 유습뿐 이였다. 두 사람의 사랑의 끈은 끈끈하여 유습이 터키로 떠난 후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하게 된다. 그 아기의 이름을 순이는 유습과 자신의 이름에서 따온 `유순`이라고 지었다. 순이는 떠나버린 유습을 그리면서 유순이를 정성껏 키우기로 작심하였다. 부대 철수 명령으로 갑자기 터키로 귀국한 유습은 뒤늦게 이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전쟁의 상처가 깊었던 엄마 순이는 유순이 5살 때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다. 아이는 고아원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유습은 터키에서 제대 후 가업을 이어 조그마한 사업을 시작하였다. 건실한 청년 유습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상당한 부자가 된다. 유습이 겨우 수속을 하여 한국을 찾았을 때 이미 순이는 세상을 떠났으며, 고아원에 맡겨진 `유순이`의 행방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푸른 눈의 유순이는 당시로서는 이 땅에 살기 어려워 이국땅 어느 곳으로 입양되었을 확률이 높다. 이러한 사연을 모르고 살아갈 유순을 찾기 위한 노력은 터키의 언론에서도 보도되었다.

놀라운 것은 터키의 청년 장교 출신 유습은 열심히 노력하여 오늘 터키의 10대 재벌의 회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비오는 날에는 팔순을 넘은 유습은 오늘도 터키 수도 터키 앙카라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를 찾고 있다. 아직도 전쟁터에서 만난 순이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파란 눈의 전쟁고아 유순이를 찾아 줄 수 없을 까요. 한국 전쟁의 비극은 6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멀리 터키 땅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한국전의 은인인 터키인들의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 최소한 터키를 찾는 한국인들이여 그것을 잊지 말기를 당부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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