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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셔츠와 갈색 바지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4-05-02 02:01 게재일 2014-05-0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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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대해, 외항선이 파도를 헤치며 나아간다. 해적선 한 척이 나타나 그 배를 포위한다. 선원들이 허둥댈 때 선장이 일등 항해사에게 명령을 내린다. 위엄을 잃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 빨간 셔츠를 가져오라!”라고 말한다. 빨간 셔츠를 입은 선장은 선원들과 힘을 합쳐 배에 오르려는 해적들에 맞선다. 가벼운 부상을 입은 선원들이 생기긴 했지만 무사히 해적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

며칠 뒤 망루에 있던 파수꾼이 이번엔 두 척의 해적선이 나타났다고 외친다. 공포에 질린 선원들은 몸을 웅크려 숨을 곳만 찾았다. 선장이 예의 위엄을 갖춘 채 소리쳤다. “내 빨간 셔츠를 가져오라!” 저번에 비해 사상자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날 밤 갑판에 나온 선장과 선원들은 별을 바라보며 승리를 자축했다. 존경에 찬 낯빛으로 누군가 선장에게 물었다. “왜 빨간 셔츠를 입으시는 겁니까?” 선장만이 지을 수 있는 위엄한 표정으로 그가 답했다. “빨간색 셔츠를 입으면 부상으로 피를 흘려도 들키지 않는다. 그러면 너희도 두려움 없이 싸움을 할 수 있지 않느냐.” 선원들은 선장에 대한 자신들의 신뢰가 헛되지 않은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다음날 새벽 이번엔 해적선이 떼거지로 몰려왔다. 모두 열 척이었다. 선원들은 당황했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겐 `빨간 셔츠`의 용감한 선장이 있지 않은가. 침착하게 선장의 지시만 기다렸다. 드디어 선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갈색 바지를 가지고 오라!”

비교적 평화 또는 약간의 위험 상태에서는 누구나 본심을 숨길 수 있다. 하지만 진실로 다급할 때 그 본심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약하고 비겁하며 위선에 가득 찬 경우라면 저부터 살기 위해 갈색 바지를 찾을 것이고, 원래 강하고 정의로우며 참된 길을 도모하는 경우라면 끝까지 빨간 셔츠를 가져오라고 명할 것이다. 갈색 바지를 숨기고 있으면서 빨간 셔츠를 잘도 말하는 곳, 뼈아픈 참사 이면을 들여다보면 곳곳이 이런 현상들로 얽혀 있다. 이것이 우리 현실인 걸 어쩌란 말이냐.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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