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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마중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4-03-05 02:01 게재일 2014-03-0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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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람없이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복 받은 일이다. 새 학기다. 강좌마다 손봐야 할 계획서와 강의록은 저만치 밀려 있고, 마감을 지켜야 할 개인적 원고도 쌓였다. 거기다 매일 1천 자의 생활칼럼까지 넘겨야 하니 조금씩 부담이 몰려온다. 여유 있을 때 너무 놀았다. 막판에 가서야 몰아붙이는 나쁜 습관을 원망하고, 천성적으로 게으른 성정까지 탓해보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다. 긍정의 믿음으로 헤쳐 나갈 수밖에. 이럴수록 힐링이 필요해. 마침 친구들과의 약속도 있겠다. 가벼운 맘으로 집을 나선다.

미세먼지가 사라진 하늘빛은 맑고 선명하다. 가장 깨끗한 선녀탕의 물빛을 밤마다 선녀들이 하늘로 퍼 나른 듯 투명하고 시리다. 만개한 꽃잎만큼 번져오는 백매향과 홍매향에 저마다의 낯빛이 환해지고, 봄 마중에 달뜬 마음들 금세 터질 것 같은 녹매 봉오리에 가서 달렸다. 납작하게 대지에 밀착한 봄냉이는 제 넓은 치마폭으로 덜 풀린 땅의 기운을 북돋운다. 기어이 봄이 오고 있었다.

목까지 차올랐던 조급함도, 엉덩이까지 내려갔던 의기소침도, 순응하지만 거리낄 것 없는 자연 앞에서는 별 것 아닌 게 돼버린다. 머리 맑아지고 가슴 트이는 건 숨길 필요조차 없는 서로의 표정에서 드러난다. 따스한 분위기가 꺼질세라 예정에 없던 한 집을 방문한다. 버선발로 맞는 그미는 금세 인정 바이러스로 우리를 감염시킨다. 온몸과 마음으로 봄의 생기를 전해준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의 주인이 되고 어리석은 자는 마음의 노예가 된다고 했다. 잠깐의 봄나들이로, 아니 친구들 덕에 마음의 노예에서 주인으로 거듭난 느낌이다. 기대는 자에게 자연은 가깝고, 많은 짐도 정(情) 앞에서는 가볍다. 정은 낭비할수록 마음 부자가 된다는 걸 알겠다. 오래 만났다고 돈독하고, 오늘 봤다고 얕은 맘이 되는 건 아니다. 여러 발걸음이 한 마음으로 되는 건 소위 마음 밭이 통하기 때문이다. 맘 아끼지 않고 멈칫거리지 않은 채 누군가와 길 나설 수 있다는 것, 그거야말로 이른 봄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이다.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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