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대한민국 대표 창작뮤지컬 `명성황후` 주인공 이태원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가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5회에 걸쳐 포항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특별공연된다.
포항시가 주최하고 경북매일신문이 주관한 이번 뮤지컬 `명성황후` 포항특별공연은 포항운하 개통을 축하하고 포항시민들에게 문화예술의 정수(精髓)를 알리는 한편 `역사를 잊은 국민에게는 발전이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1995년 공연된 이후 19년 동안 국민의 폭넓은 사랑을 받으면서 전국 50개 지역에서 공연된 바 있다. 대구·경북지역에서는 대구, 구미와 김천에서 공연된 바 있으며 경북의 제1의 도시인 포항에서는 `명성황후`공연이 무대에 올려진지 19년 만에 포항시와 본사의 유치노력으로 특별공연의 결실을 맺게 됐다.
장장 19년간을 장기공연해오면서 1977년 동양최초로 뉴욕 브로드웨이 링컨센터에 진출했고 국내 뮤지컬 넘버 중 최고곡(54곡)을 수립했으며, 공연 1회에 소요되는 무대의상만 해도 600벌로 최고의 기록을 세우는 등 뮤지컬 `명성황후`는 지금까지 숱한 화제를 뿌리고 있다. 그 명성황후역의 걸출한 뮤지컬 명배우 이태원(48·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학부장)씨를 13일 만나 포항특별공연에 임하는 소감 등을 들어봤다.
△포항특별공연을 축하드린다. 많은 사람들이 배우 이태원은`뮤지컬의 여제(女帝)`라고 부르는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뮤지컬`명성황후` 주역배우로서 역사속의 명성황후를 어떻게 평가하나.
- 처음 이 작품에 출연하기 위해 마음먹었을 때는 제가 미국에서`왕과 나`에 공연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명성황후가 어떤 인물인지 몰랐다. 제가 중학생 때인 1981년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왔기 때문에 한국역사에 대해 공부를 할 여건도 안됐다. 그 후 배역을 맡고서 역사를 따라 가다 보니 명성황후는 한마디로 명석한 여인이었고, 다방면에서 매우 사랑스런 여인이었음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은 명성황후는 조선 말, 일본의 음모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된 비운의 옹비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제가 역을 맡으면서 연구하고 느낀 명성황후는 암울한 시기에 구국을 위해 몸 바친 시대의 여걸이었고, 우리의 역사에서 아름답고도 슬픈 과거를 한 몸에 안고 살다간 여인이었다. 명성황후란 그 명성(名聲)에 흠이 안가고 또 시대 상황을 부각시키려 뮤지컬에서 혼신의 노력을 해 왔다.
△이민 1.5세대인데, 중고시절부터 뮤지컬에 관심을 가졌는지 궁금하다.
- 중고시절에는 음악공부를 하지 않았다. 미국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개척교회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교회 내 성가단에서 활동을 했다. 고교 3학년 때 대학 입학을 몇 달 앞두고 뉴욕의 줄리어드 음대에 갈 생각을 했다. 어릴 적에 장남감을 조립·분해하는 것을 좋아해서 부모님은 제가 공대에 갈 줄 알았다고 하셨다.
줄리어드 음대를 나와 1992년에 줄리어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땄고, 95년에는 피바디콘서바토리에서 예술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뒤 뮤지컬 활동을 했는데, 처음 공연한 뮤지컬 작품은?
- 1995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왕과 나` 오디션에 응모했다. 당시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왕비역으로 발탁되면서 브로드웨이 전문 뮤지컬 배우가 되어 활동했다. 운이 따랐던 것 같다. 그 후 1997년에 뮤지컬`명성황후`에 발탁돼 한국으로 건너오게 됐다.
△뮤지컬 `명성황후`에 발탁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하던 당시에 한국에서 윤호진 연출가가 미국 브로드웨이 진출을 앞두고 외국 무대에 설만한 명성황후 역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무조건 전화를 걸었다. 제가 이러이러하니 한번 써보시면 어떻겠느냐고. 그런 후 윤 연출가에게 “명성황후가 뭐예요?”하고 여쭤봤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당시엔 국사를 몰랐으니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호진 연출가님이 미국에 오셔서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인`왕과 나`를 직접 보고서 저와 인터뷰를 했다. 그 당시 반응은 노래는 일단 괜찮다고 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인연이 되어, 명성황후 주역을 맡아 1997년 뉴욕 브로드웨이 링컨센터에 공연을 했다. 명성황후 배역은 2010년까지 하다가 다른 작품을 하기 위해 몇 년 쉬고서 작년 말 대구공연부터 다시 시작했으니 16년 동안 명성황후 자리에 있는 셈이다. 뮤지컬 끝부분의 마지막 노래는 전율을 느낄 만큼 저를 몰입하게 만들어준다.
△지난해 연말 대구공연이 성황리에 마쳤는데, 고향지역에서 공연하고 느낀 소감은.
- 14년 동안 명성황후 역을 맡았지만 3년을 쉰 후에 다시 뮤지컬 `명성황후`에 복귀해 배우들과 호흡을 맞췄다. 과거에 대구에서 공연한 바 있지만 대구는 아무래도 저의 고향지역이니까 마음이 포근한 편이다.(이태원은 고향이 경북 김천임) 대구 공연에서는 마음이 통하는 고향 후배 이혜경 배우(고향이 경북 영덕임)와 더블캐스팅으로 공연해 더욱 마음이 편했다.
대구 공연에서는 명성황후의 부드러운 여성적 면모를 드러내려 노력했다. 지역 분들이 저의 공연을 보고 박수치고, 격려를 많이 해 줘서 한 달간 공연이 어떻게 지나가는 줄 몰랐다. 특히 대구가 뮤지컬의 도시라할 만큼 시민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커서 뮤지컬 배우로서 뿌듯한 긍지를 느끼며, 더 열심히 해야지 하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이 기회에 고향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번에 포항운하 준공기념으로 포항에서 3일간이지만 특별공연을 하게 됐는데, 포항에 대한 느낌은.
- 뮤지컬 `명성황후` 공연을 하러 전국 32개 주요도시를 거쳤지만 포항공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포항은 인구가 50만이 넘고 또한 경북에서 가장 큰 도시로 국가경제발전의 상징인 포스코가 있다. 또한 얼마 전에 포항운하가 준공됐다고 들었다. 포항이 새로운 해운·태평양시대에 우뚝 서는 계기가 될 것이고 더욱 발전되기를 기원한다. 아울러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포항시민들 앞에서 뮤지컬 `명성황후`를 공연하게 되어 기쁘다. 경북매일신문이 앞장서서 지역문화의 견인차 역할을 해주시면 고맙겠다.
△최고의 뮤지컬 배우로서, 갑오년 말띠 해를 맞아 각오는 어떠한가. 그리고 평소 생활은.
- 제가 말띠인데 올해가 갑오년이어서 느낌이 새롭다. 생활은 공연이 기획된 주에는 그 준비에 여념이 없고, 공연이 없는 날에는 제가 맡고 있는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는 학생들에게 뮤지컬 배우는 독기가 있어야 하고, 자기 일에 대해 끝까지 놓지 않는 집념이 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말은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한데, 여가시간에는 사회활동을 폭넓게 하려하고 있다.
공연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즐거운 마음으로 맞는다.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제 이름이 “클 태(太), 나라 동산 원(苑)”이다. `넓은 동산`이라는 뜻으로, 말띠인 제가 `초원 같은 넓은 동산에서 뛰어 놀아라`는 의미라고 하셨다. 제 이름처럼 정말 열심히 뛰놀며 살고 있으며 지루한 것은 참지 못하는 화끈한 성격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