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만에 이산가족이 금강산에서 재회한다는 기쁜 소식이 들린다. 혈육을 가까운 거리에 두고 60여년이나 만나지 못함은 분단 민족의 최대의 비극이다. 분단시의 1천만 이산가족이 이미 수 백 만으로 줄어들었다. 그중 지난 30년간 겨우 2만5천명만 이산가족의 만남이 성사 되었다. 남쪽에서 가족 면회를 신청한 12만 명 중 벌써 5만 명 저 세상으로 떠나고, 아직 7만 명이 남아 혈육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도 우여 곡절 끝에 금강산 재회가 성립되지만 겨우 180명만 해당될 뿐이다. 이들이 만남이 이산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치유하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이산가족 중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행복하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북에 있는 가족을 도저히 만날 수도 없고,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도 있다. 시골 우리 고향에는 6·25 나던 해 행방불명된 가까운 친척 한분이 계신다. 우리 동네 최고 수재이고 결혼까지 한 그가 서울 공과대학에 추가 졸업한다고 떠난 후 여태껏 소식이 없다. 여러 해 동안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소식이 없자 집에서는 제사까지 지내고 있다. 10 여전 어느 날 중국을 경유한 편지 한통이 그 집으로 도착하였다. 그가 다섯 남매를 두고 북한에 살아 있고 고위급 간부로 일하다 은퇴하여 잘 살고 있다며 혈육을 만나자는 내용이다. 그가 어찌된 연유로 북에 갔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여든이 넘도록 고생하면서 혼자 살아온 청상과부인 부인의 배신감은 어떠했으랴. 이산가족 중에는 이런 저런 사연으로 만날 수 없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6·25 전쟁시절 공산군 치하에서 여러 달 살았던 나는 당시 북에서 온 얼굴이 검은 어느 인민군 아저씨를 아직도 기억한다. 어릴 때 그가 함북 회령이 고향이라는 소리만 들은 적 있다. 그는 북한 공산군이 퇴각하자 우리 동네에 그대로 남아 탈영병이 되고 만 셈이다. 그는 포로 교환에도 응하지 않고 어느 댁에 입양하여 이곳에서 결혼까지 하였다. 그도 필시 고향에는 자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그의 부모님이 계셨을 텐데 탈영병 신분인 그는 가족의 면회도 신청할 수도 없다. 여든이 넘은 그가 지금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나의 동료 교수 역시 1·4 후퇴 때 부모님과 함께 남쪽으로 온 사람이다. 서울서 가까운 해주가 고향이란다. 그는 남한에 잘 정착하여 이곳에서 상당히 이름 있는 학자가 되었다. 그는 아직도 선대로 부터 물려 받은 고향 땅 문서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통일이 되면 고향의 논밭을 되찾겠다는 강한 집념인지도 모른다. 그는 가끔 북한 고향 땅이 그립지만 친지가 모두 세상을 떠나 이산가족 신청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벌써 이 땅을 찾은 근년의 탈북자가 2만5천명을 넘었다. 우연한 계기로 만난 탈북 청년이 있다. 내 강좌의 학생들에게 북한의 사정을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고향이 두만강 상류 탄광지역 무산이라고 하였다. 인물도 준수할 뿐 아니라 북에서 중학을 중퇴한 학생치고 꽤 똑똑한 청년이다. 중국 친척집에 가기위해 두만강`강 타기`를 한 것이 남한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 땅에서 살아가는 부모님이 몹시 그립다고 토로하였지만 재회의 꿈은 엄두도 못 낸다. 북한 형법상`공화국 배반자`가 된 탈북자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는 아직도 그가 탈북한 사실까지 숨기고 있다고 전했다.
이 땅에는 이런 저런 사연으로 북의 가족의 재회를 생각 할 수 없는 사람이 예상외로 많다. 남북의 가족과 혈육의 만남은 인도주의의 최소한의 요건인데 말이다. 이번의 금강산 만남이 이러한 비극을 하나씩 풀어 가는 계기가 되어야한다. 나아가 이번 재회가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남북문제가 잘 풀려서 남북의 신뢰가 새롭게 형성되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