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안강 바람골에서 돈과 명예, 재색명리에 기웃거리지 않고 도자기하나만 잡고 평생을 버틴 사람이 저 유명한 도예가 윤광조(69)다. 이런 내공이 쌓인 분이 왜 경주까지 흘러와서 살아가는 지도 의문스럽다.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독락당에서도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 올라가면 저수지 끝 바람골이 나타난다. 1994년 경기도 광주시 지월리에서 홀연히 사라졌다가 새롭게 정착한 곳이 대낮에도 인적이 끊긴 적적(寂寂)성성한 이곳이 자신이 누울 자리란다.
한때나마 번뇌와 심각한 싸움을 벌일 때도 있었다. 그 때 홀연히 만나 분이 법정 스님이었다. 지리산 정각사에서 기세 좋은 스님들도 힘든 4만배를 하고나서야 인간의 본성과 자연의 섭리에 가까워져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세상의 기득권이 자신의 몸을 떠나고 홀로 남게 된 것을 스스로 느꼈다”는 것. 이렇게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은 명사(법정 스님)를 만난 인연이라고 했다. 세계적 예술가도 인간이 갖는 고뇌를 털지 않고는 무엇이든 완성할 수 없는 모양이다.
윤광조와 분청은 운명처럼 만난다. 대학(홍익대학교)을 졸업하고 서울 청진동 책방에서 첫 눈에 들어온 미시마(三島·고유섭이 분청사기라고 이름을 짓기까지 일본인이 미시마라고 불렀다)를 보고나서부터다.
이때부터 일본어를 공부하고 평생 멘토가 되어주신 최순우에게 질문을 쏟아 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접신(接神)이 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후학의 열정에 감동한 최순우는 그의 스승이었던 고유섭의 별호 급월당(汲月堂)이란 특별한 호를 내렸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광주시 충효동 분청사기 요지의 도자편을 정리함으로써 분청에 취하고 운명에서 취했다.
분청사기는 조선시대 전기, 요즘으로 치면 왕실은 물론 서민들까지 애용했던 국민도자기다. 자연스럽고, 천연덕스러워 쓰기 편하고 만드는 밑천이 얼마 들지 않으니 나무그릇을 즐겨 썼던 평민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생활용기가 되었을 것이다. 분청사기는 조선시대 자연주의 극치를 보여준다. 지역별로도 특색이 뚜렷해서 경상도 분청사기, 충청도 분청사기, 전라도 사기로 구분된다.
그는 숱한 실패과정을 거치는 동안 귀얄기법(호남)과 조화기법, 박지기법을 선호하게 되었다. 붓 자국이 선명하게 분칠하는 방식이 귀얄기법이다. 대나무 칼이나 짚 따위로 긁어서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 조화기법이며, 바탕을 긁어내어 이미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 박지이다. 필자가 방문을 했을 때도 분을 깎는 도구를 직접 만들고 있었다. 돈이면 해결되는 현세와는 딴판이었다. 그렇지 않고는 마음에 차는 작품을 세상에 낼 수 없다고 한다.
1976년 서울에서 열린 윤광조 첫 개인전 발문에서 최순우는 “빛나는 도예 전통을 짊어지고 태어난 한국의 도예인들은 부질없이 먼 곳에만 한 눈을 팔 것 없이 우리의 고마운 발밑을 착실히 살피라”고 적었던 것처럼 우리 것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2001년 가을 서울 호암미술관에서 열린`분청사기명품전Ⅱ`에 출품된 윤광조의 작품에 감동을 받은 필라델피아 박물관 동양부장 펠리스 피셔 박사는 경주까지 찾아와 필라델피아박물관을 비롯해 버밍햄미술관, 시애틀미술관에서, 그리고는 2012년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분청사기 명품전`에서 그의 작품 `카오스`가 대표 작품으로 내세워 졌을 때도, 2004년 올해의 작가상 수상 때도 항상 무덤덤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 세계는 항상 요동친다. 편병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물레를 치우고 손으로 주물럭거려 자연스런 형상도 만들었다. 삼각형 기둥 모양의 도자기로 방향을 정함으로써 도자기가 둥글어야 한다는 전통 관념을 훌훌 떨쳐버렸다. 바깥 면에도 귀얄 붓질을 하거나 그리기 보다는 화장토가 자연스럽게 표면 위에 흘러내리게 해 인공미를 빼고 자연스러움을 극대화 시켰다.
요즘 들어서는 `카오스(chaos)`란 제목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폭발하기 까지 긴 세월 치열한 탐구 속에서 나온 화두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1년 365일 동안에 만든 작품이 고작 10~12점 뿐이다. 살아가는 방법도 분청사기처럼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