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이후 국정원이 한국정치의 중간에 서있다. `음지에서 일하지만 양지를 지향한다`는 국정원의 모토와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 현상이다. 지난 한 달 여간 들끓었던 국정원 관련 청문회는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여야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고 끝난 국회 청문회에도 국정원의 대선개입 의혹이 문제의 중심이 되었다. 오늘날 파행 국회도 야당의 거리 투쟁도 그 배경에는 국정원 문제가 가로 놓여 있다. 한국 정치의 중심에 국정원이 서 있는 것은 국정원이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있지만 우리 정치의 한계이며 비극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이 정치적 쟁점이 되었을 국정원장은 전격적으로 남북회담록을 공개해 버렸다. 신임 남재준 원장이 `국민의 알 권리`와 `국정원의 명예 보호`라는 명분으로 공개했지만 그 결과 얻은 것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전직 대통령의 NLL포기 발언의 진상도 규명치 못하고 해석상의 분란만 자초했기 때문이다. 결국 국정원의 정상회담록의 공개는 국정원의 명예도 지키지 못하고 앞으로의 이 나라의 정상 외교를 위해 손실만 자초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국정원의 댓글 사건만 해도 그렇다. 국정원의 댓글 사건은 대선 결과에 미친 영향과는 별개로 선거 개입 사건이었음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검찰이 이 문제를 국정원법 위반이 아닌 선거법 위반으로 송치한 것도 이를 잘 입증한다. 국정원측은 댓글이 자신들의 통상적인 대공 업무의 일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박 대통령도 `지난 선거에 국정원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나 야당은 국정원의 댓글이 일종의 선거 개입이며 국기 문란 행위라고 규탄하고 있다. 야당이 한 달 이상 천막 농성을 하면서 국정원의 개혁을 요구하고 시민 단체가 촛불 집회를 여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국정원의 댓글과 경찰의 축소 은폐 의혹 역시 사법적 판단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번 RO 관련 국가 내란 음모 사건의 조사의 중심에도 국정원이 서 있다. 종북과 관련된 문제의 성격상 국정원의 수사권 발동은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정원은 이번 사건의 압수 수색과 관련자 체포 과정에는 그들의 활동 모습이 화면에 전면 노출되어 버렸다. 청문회 과정에서 직원들의 출석 장면과 관련자들의 발언까지 비공개를 요구하던 국정원이 아니었던가. 이 사건은 어차피 검찰의 공안부서에서도 다룰 문제가 아닌가. 국정원이 증거를 수집을 위한 은밀한 수사이상으로 전면에 노출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처신인지 묻고 싶다.
국정원의 민감한 정치 현안에 관한 최근의 폭로와 노출, 입장 표명 등을 어떻게 볼 것인가. 국정원의 이러한 처신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있다. 여권과 보수층에서는 국정원의 이러한 행보를 국가안보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찬성할지도 모른다. 특히 이번의 종북 좌파의 색출 관련 국정원의 단호한 수사는 여론의 지지까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정원의 빈번한 정치적 발언으로 정쟁의 중심에 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뿐 아니라 비난의 대상이 됨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 야권과 진보 진영에서는 국정원의 이러한 일련의 정치 행태를 신맥카시즘(McCarthyism)적 수법, 유신의 부활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뉴욕 타임스까지 한국의 최근 정국을 공안 정국이라고 우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국제적 외교적 위상은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이제 국정원도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걸맞는 정보기관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국정원이 이제 과거 독재 정부 시절의 공안 통치나 공작 정치로 회귀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 그리하여 국정원이 국민으로부터 진정으로 사랑받는 `국민의 정보기관`으로 다시 태어나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