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오는 금발의 잉에를 사랑했다. 웃고 있는 길쭉한 푸른 두 눈에 빠졌고, 수많은 웃음소리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구별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잉에 역시 토니오를 고려해본 적 없었다. 그녀는 같은 부류인 한스와 사랑에 빠졌다. 잉에와 한스 같은 안정되고, 평화롭고, 정돈된 치들은 애잔한 단편소설 따위는 읽지 않고, 그런 작품을 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토록 아름답고 무심하고 명랑할 수 있다. 그것이 토니오의 슬픔이다.
앨리스는 남자 친구 에릭을 사랑했다. 자신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그 남자의 행동에 좌절했다. 그녀는 혼란스러웠지만 그것을 최선의 경우로 해석하려 했다. 그것이 그녀 사랑의 증거였다. 남자가 짜증을 내면 과로 때문이라고 받아들였고, 말이 없으면 배가 고파서 그럴 거라 믿었다. 내 탓은 아닐 거야. 마음의 상처 때문에 화를 내는 걸 거야. 퉁명스런 남자의 태도를 수줍음이나 환경 탓으로 돌렸다.
개뿔! 앨리스와 토니오의 사랑법은 상처의 개인사이다. 한스와 잉에와 에릭은 그 둘을 덜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엔 공평한 저울추가 없다. 더 사랑해서 패배하거나, 덜 사랑해서 상처가 없거나, 무관심해서 추억조차 없을 뿐이다. 그래도, 그래도 우리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랑에 빠지는 건 그 순간만은 승리자가 되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엔돌핀이 백만 배는 솟구친다. 백전백패하면서도 사랑이란 문밖을 서성이는 이유다. 토마스 만과 알랭 드 보통도 그쯤은 알고 있었으렷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