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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울랄라세션 그리고 아내

등록일 2013-03-15 00:33 게재일 2013-03-15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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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원국회의원
최근 영화로도 개봉된 에이브러햄 링컨의 생애는 문자 그대로 위대한 역사다.

문맹인데다 생활력도 없는 아버지 토머스 링컨과 계모 밑에서 농장일을 하던 소년 링컨에게는 학교교육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다. 스물두 살에 집을 나와 점원, 장사꾼, 우편배달부, 측량기사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1832년에는 생애 최초로 주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3표밖에 얻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그후 8년간 주의회 의원으로 일한 후 1858년에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해 민주당의 스티븐 더글러스와 `노예제도는 미국 독립선언서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논쟁을 벌이면서 인상적인 연설과 확고한 신념으로 주목받았으나 낙선했다. 결국 이때의 경험으로 1860년 11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노예제 유지문제로 분열한 민주당을 이기고, 공화당 후보로 당선됐다.

대통령 재임시 그는 노예해방을 이뤘으며, 자신에게 `긴팔원숭이`라며 욕했던 정적 스탠턴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해 60만명이 전사한 남북전쟁을 종식시켰다.

남북전쟁 직후 존 부스에게 암살되기까지 그의 생애는 절망에서 일어나 희망을 이끈 포용력과 인간애의 결정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생동안 불행했다. 링컨을 지켜본 베버리지 상원의원은 링컨의 삶에 있어 가장 두드러진 점은 `너무 짙어서 그 깊이를 재거나 상상할 수 없는 슬픔으로 점철된 인생`이라고 규정했다. 링컨에게 드리워진 짙은 슬픔의 실체는 가정생활이었다. 어린 시절의 가난도 그렇지만, 그가 33세 때 메리와 결혼한 이후 단 하루도 단란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녀는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변호사 링컨에게 끝없는 잔소리꾼이었으며, 백악관에서는 대중들 앞에서 링컨을 모욕하기 일쑤였다. 수시로 진흙탕에 드러누워 버리겠다고 난동을 부리거나 각료회의에 난입해서 대통령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심지어 메리는 링컨 대통령이 암살된 후 링컨의 임기말까지의 대통령의 급료 10만불을 내 놓으라고 의회에 요구해 2만2천달러를 받아냈다. 의회와 미국민의 반발은 하늘을 찔렀다. 그녀의 사후 지인 오노레 모로는 그의 책 `메리 토드 링컨`에서 `그녀는 성질이 더럽고 남편의 골칫거리에다 상스러운 멍청이고 정신이상자였다`고 평했다.

이런 아내에 대해 링컨은 성자처럼 참아냈다. 미국인은 링컨 부부를, 위엄있고 누구나 사랑하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위대한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과 천박하고 상스러운 미치광이 부인 메리 링컨으로 기억한다.

역사적으로 현인의 옆에는 악처가 있었다. 악행으로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가 있지만, 공자님도 괴팍한 성격의 부인 올관(兀官氏)씨를 쫓아냈다고 한다. 링컨 대통령도 종종 소크라테스에 비유되곤 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일까.

1841년 1월 1일 오후 6시 30분 링컨은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명문가 출신 메리 토드와 결혼식을 하게 됐다. 그런데 신부측에서 많은 하객을 불러놓은 결혼식장에 링컨은 나타나지 않고 도망쳐버렸다. 엄청난 망신을 당한 메리는 어떻게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링컨을 찾아다니며 설득했고, 이듬해 11월 4일 밤에 링컨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마음이 바뀔까봐 두려운 나머지 그녀는 곧장 동네 교회의 목사에게 내키지 않아하는 링컨을 데려가 결혼식을 올렸다. 링컨 부부는 그렇게 맺어졌다. 세상만사 뿌린대로 거두는 법. 그날 이후 평생 동안 링컨에 대한 그녀의 복수가 이어졌던 것이다.

얼마전 울랄라세션의 맴버로 활동하다 암투병 끝에 얼마전 사망한 고 임윤택의 아내 이혜림 씨가 `이젠 기쁜 마음으로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준 사람. 이토록 멋진 남자의 아내인 나는 지금 이 순간도 참 행복합니다. 우리 다시 만날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글을 남편에게 남겨 고 임윤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문득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내 아내에게 나는 어떤 의미일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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