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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은 산업·의식·국방·녹색혁명”

이대환작가
등록일 2013-02-14 00:19 게재일 2013-02-14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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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 설립에 즈음하여<br>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
▲ 1970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의 포항 항만 방문 당시 모습. 왼쪽 끝에 당시 박근혜 양, 육영수 여사, 오른쪽에 박정희 대통령, 박태준 사장의 모습이 보인다.

"박정희의 功은 혁명이라 부를 만한 4대혁명이다. 5천년 절대빈곤의 농경사회를 산업사회로 확실히 탈바꿈시켰다는 것이다.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했다. 그 기적의 저변에는 `공돌이``공순이`라 불린, 현재 60세를 넘은 기성세대의 피땀이 쌓여 있었다.""박태준의 공적은 박정희의 4대혁명 속에 소중한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산업혁명에는 제철의 대성공이 있다. 의식혁명에는 세계일류주의가 있다. 안보혁명에는 `철강과 과학기술은 국부와 국방의 원천`이라는 실천이 있다."□박정희의 공과 또는 명암

▲ 1992년 10월 3일 국립현충원의 故 박정희 대통령 묘소 앞에서 4반세기 대역사의 과업 완수를 보고하는 박태준 회장.

`박근혜 정부` 출범으로 결말난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 평가는 공과(功過) 또는 명암(明暗)으로 선명히 갈렸다. 또한 세대 간 인식의 낙차가 뚜렷하여 젊은 세대는 과(암)에 대한 학습효과의 기억이 두텁고, 50대 이상은 공(명)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긍정이 두터웠다.

박정희(이하 인명만 씀)의 `공(명)`은 성공한 혁명가라는 것이고 `과(암)`는 그것을 위해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독재정치를 했다는 것이다. 이제 과(암)의 상징처럼 떠올리는 말은 쿠데타, 유신체제, 김지하 시인, 인혁당 사건 등이다.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했으니 `쿠데타`라 불러야 마땅한 5·16에 대하여 장준하는 1961년 6월호『사상계』권두언에서 “4·19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 했다. 암울한 시대에 비판적 지성의 거점이요 산실이었던『사상계』. 장준하의 그 권두언은 4·19 직후 한국사회를 질타하는 격문에 가까웠다. “민주당은 혁명 과업의 수행은커녕 추잡하고 비열한 파쟁과 이권운동에 몰두하여 바쁘고 귀중한 시간을 부질없이 낭비해 … 국민경제는 황폐화하고 대중의 물질생활은 더 한층 악화되고 사회적 부는 소수자의 수중으로 집중하였다. 그 결과로 절망, 사치, 퇴폐, 패배주의 풍조가 이 강산을 풍미하고 있었다.” 장준하가 박정희처럼 5·16을 혁명이라 불렀다 해도 5·16 그 자체는 쿠데타였다. 그러나 그 귀결이 혁명이었다. 5·16은 쿠데타로 출범하여 혁명으로 귀결했다고 정리할 때, `귀결이 혁명이었다`는 그 속에 박정희의 공(명)이 역사적 실체로 실존하고 있다. 그 공(명)의 뒷면이 과(암)이고, 그 과(암)는 `독재`라 불린다. 그런데 과연 독재 없는 혁명이 있을까? 혁명 없는 독재는 있지만, 독재 없는 혁명이 있을 수 있을까? 노동해방의 공산주의혁명에도 반드시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있어야 한다지 않는가?

박정희의 공(명)은 혁명이라 부를 만한 4대혁명이다. 산업혁명, 의식혁명, 안보(국방)혁명, 녹색혁명. 산업혁명은 5천년 절대빈곤의 농경사회를 산업사회로 확실히 탈바꿈시켰다는 것이다.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했다. 그 기적의 저변에는 `공돌이``공순이`라 불린, 현재 60세를 넘은 기성세대의 피땀이 쌓여 있었다. 의식혁명은 산업화의 정신적 동력이었다. 조선시대의 신분세습과 노예제도(노비가 인구의 40% 이상이었음), 소중화(小中華) 맹신, 식민지, 전쟁, 절대빈곤, 부정부패 등이 대대로 조장해온 패배주의, 사대주의, 파벌주의, 한(恨), 심지어 `엽전`이라 불린 그 오래고 어두운 의식구조에다 “우리도 하면 된다” “세계로 나가자”라는 도전의식과 진취기상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안보혁명은 최초로 자주국방을 기획하고 실천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후 류성룡이 피눈물로 쓴『징비록』에서 그토록 강조한 `자강(自彊)의 국가`가 350년이나 지난 뒤에야 국가의 진정한 비전으로 추진되었다. 자주국방, 부국강병 없는 근대국가는 없다. 녹색혁명은 헐벗은 강토를 푸르게 가꾸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푸른 산은 박정희 통치시대가 물려준 `푸른 혁명`의 푸른 증거다.

박태준의 공적은 박정희의 4대혁명 속에 소중한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산업혁명에는 제철의 대성공이 있다. 의식혁명에는 철저히 추구한 세계일류주의가 있다. 안보혁명에는 세계 최고 제철소뿐만 아니라 포스텍,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의 바탕에 흐르는 “철강과 과학기술은 국부(國富)와 국방의 원천”이라는 확고한 사상과 실천이 있다. 1962년 1월 `무연탄을 쓰면 자원도 되고 산림녹화도 된다`는 국립광물지질연구소 이정환 소장의 캐치프레이즈는 녹색혁명의 기본방향이었다. 십구공탄 보급으로 이어지는 그 캐치프레이즈 앞으로 박정희를 모셔간 이가 박태준이었다. 마침 박정희와 박태준은 무연탄 개발을 땔감 대체 방안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박태준은 `녹색` 애착도 유난했다. 추기경(김수환)이 “낙원”이라 칭송하고 모스크바대학 총장 빅토르 사도브니치가 “레닌 동지가 꿈꾸던 이상향”이라 부러워한 포항과 광양의 포스코 사원주택단지는 한국 `녹색주거`의 선구적 모범으로 존재한다.

▲ 1970년 4월 1일 열린 포항제철 제1기 착공식. 오른쪽은 김학렬 부총리.
□박정희와 박태준, 그리고 포스코

2004년 출간된 평전『박태준』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박정희와 박태준의 오랜 불가분의 관계를 통틀어 관찰할 때 매우 특이한 점이 있다. 오늘날에 보편적으로 박정희의 영예로 평가되는 공적의 자리에서는 박태준의 영예도 함께 빛나지만 박정희의 음영으로 평가되는 과오의 자리에서는 박태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진귀한 귀결은 박정희와 박태준의 관계를 살피는 가장 흥미로운 관점이다. 그것을 실증하는 작업은 대한민국 근대화 무대를 지나치게 정치운동사 중심으로 조명하고 해석해온 기존의 편견과 왜곡을 바로잡는 역할도 할 것이다.”

그 `특이하고 진귀한 귀결`의 이유는 명백하다. 박정희가 자신의 과(암)를 기록한 `정치` 방면이 아니라 자신의 공(명)을 세우는 `경제` 방면에 박태준을 배치했고, 박태준은 부여받은 사명을 훌륭하게 실현했다는 것이다. 정치냐 경제냐, 이 갈림길이 박태준의 눈앞에 나타난 때는 1963년 9월이었다. 1948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강의실에서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난 두 인물은 1950년 후반부터 깊은 대화의 술자리를 시작하여 1960년 부산 군수기지사령부에서 거사를 꿈꾸는 사령관과 인사참모로 지낸 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상공담당 최고위원의 관계에서 1963년 가을을 맞았고, 이때 박정희는 윤보선과의 대선 경합을 앞둔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다.

1963년 9월 어느 날, 두 인물은 독대한다.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군으로 돌아갈 거냐고 묻자, 그는 권력의 단물을 빨다가 돌아가면 군대에 불평만 늘어난다며 고개를 젓는다. 박정희는 답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조사를 시켜봤는데 당선에 문제가 없으니 고향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고 권유한다. 그의 답이 걸작이다. “저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불합리의 종합판 같은 정치에 나가서 순종 못하고 반대를 해대면 각하께서 골치 아프실 거 아닙니까?” 이러고는 미국 유학의 뜻을 밝힌다. 대선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1964년 정초에 청와대로 박태준을 불러 유학을 말리고 11개월 대장정의 일본 특사로 파견하면서 “집도 없던데 집 마련에 보태라”며 하사금을 내리고(박태준은 노년에 그 집을 팔아 사회에 기부한다), 1964년 12월에는 달러박스였던 대한중석 사장에 임명한다. 만성적자의 대한중석을 흑자체제로 돌려놓는 발군의 경영실력을 발휘한 박태준, 그를 기다리는 다음 차례가 바로 포항제철(포스코)이었다.

▲ 설비구매 재량권 `종이마패`(1970.2.2). 왼쪽 상단에 朴 전 대통령의 사인이 보인다.
 

“4대혁명 완수 밑바탕엔 포철신화”

"세계 최고 제철소 건설의 25년을 대하드라마에 비유한다면, 제1부는 포항제철이고 제2부는 광양제철이다. 포항제철의 제작과 기획은 박정희이고, 연출과 주연은 박태준이다. 박태준은 박정희와의 약속이나 박정희가 맡긴 사명을 잊은 적이 없었다."

세계 최고 제철소 건설의 25년을 대하드라마에 비유한다면, 제1부는 포항제철이고 제2부는 광양제철이다. 포항제철의 제작과 기획은 박정희이고, 연출과 주연은 박태준이다. 박정희는 1961년부터 제철소를 기획하지만 1965년 미국 방문을 통해 구체화하고, 이때부터 연출자로 지목하고 있던 박태준을 1967년 실제 연출자로 지명하여 포항제철 기공식을 열고, 1968년 4월 1일 포항제철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제작비 조달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한다. 그해 11월 영일만을 방문한 박정희가 “남의 집 다 헐어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나”라고 쓸쓸히 독백한 때는 미국, 영국 등 서방 5개국이 약조한 자금과 기술 도입이 막혀 있었다. 결국 그것은 막혔다. 대하드라마는 제작비가 없어 무산될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돌파구를 뚫는다. 1969년 2월 절망적인 상황에서 연출자 박태준이 대일청구권자금 전용의 아이디어를 내고, 제작자 박정희가 그것을 승인하는 것이다. 그날부터 박태준은 일본 정계와 철강업계 지도자들을 직접 설득하고, 그 성과 위에서 그해 12월 정부 차원의 실무를 마무리하여 1970년 4월 1일 마침내 착공 버튼을 누른다.

박정희는 포항제철을 13번이나 방문(1973년 1기 준공 전에 6번, 그 후에 7번)한다. 그리고 박태준에게 제2제철소 건설임무를 맡기고 세상을 떠난다. 대하드라마는 1980년부터 제2부다. 대통령들(전두환, 노태우)의 재가를 받긴 했으나 제2부는 제작, 기획, 연출, 주연 모두를 박태준이 맡아야 했다. 그러나 박태준은 박정희와의 약속이나 박정희가 맡긴 사명을 잊은 적이 없었다. 이것이 1992년 10월 3일 박정희의 무덤을 찾아가게 한다. 아무도 예측 못한, 오직 박태준만이 깊은 가슴속에 간직해온 그날, 그는 대하드라마 제작·기획자에게 보고한다. “각하, 포항제철은 빈곤타파와 경제부흥을 위해서는 일관제철소 건설이 필수적이라는 각하의 의지에 의해 탄생되었습니다. 그 포항제철이 어제, 포항·광양 양대 제철소에 연산 조강 2천100만 톤 체제의 완공을 끝으로, 4반세기에 걸친 대장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박태준은 울고 있었다.

박정희가 서거한 1979년 10월, 그때 이미 세계적 철강기업으로 성장했던 포항제철의 성공 요인은 무엇인가? 하버드대, 스탠포드대, 미쓰비시종합연구소 등이 여러 요인을 밝혀내면서 한결같이 `박태준의 탁월한 리더십과 능력`을 빼놓지 않았다. 나는 평전『박태준』에서 `영일만의 기적`에는 눈에 드러나지 않는 중요한 뿌리가 있으니, 바로 박정희와 박태준의 독특한 인간관계라며, 이렇게 썼다.

“박정희는 박태준의 순수하고 뜨거운 애국적 사명감만은 범할 수 없는 처녀성처럼 옹호했다. 정치권력의 방면으로 기웃거리지 않고 당겨도 단호히 뿌리치는 박태준의 기개를 높이 보았다. 여기엔 한 인간과 한 인간, 한 사내와 한 사내로서 오직 둘만이 온전히 알아차릴 수 있는 서로의 빛깔과 향기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박정희와 박태준의 독특한 인간관계는 박태준이 자신의 리더십과 사명감을 신명나게 발현할 수 있는 양호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이것은 두 인물의 만남을 산업화 시대의 `위대한 만남`으로 이끌어가는 레일이었다.

□위대한 만남을 위대한 미래로

정치입문 권유를 마다한 박태준을 박정희가 경제 방면으로 배치하게 되는 갈림길이 만들어진 1963년 9월로부터 무려 48년이 흐르고, 박정희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친 그날로부터도 32년이 흐른 2011년 9월. 박태준은 인생의 마지막 계절을 예감하면서 포철 초창기 현장 직원들 380명과 다시 만나는 시간을 마련했다. 눈물의 호수로 변한 그 자리에서 그의 마지막 공식 연설이 있었다. 광양제철소까지 완공한 뒤 박정희 유택 앞에서 `영전(靈前)보고`를 올렸던 박태준은 84세의 노쇠한 몸으로도 그를 잊지 못하여 동지들과 후배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제철소가 있어야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일념과 기획과 의지에 의해 포항제철이 탄생했고, 그분은 저를 믿고 완전히 맡겼을 뿐만 아니라, 온갖 정치적 외풍을 막아주는 울타리 역할도 해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박정희가 박태준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정치적 외풍을 막아준 단적인 증거는 1970년 2월에 생긴 이른바 `종이마패`일 것이다. 불법정치자금을 뜯기지 않으려는, 설비구매의 잘못된 관료주의를 타파하려는 박태준에게 박정희는 암행어사 마패와 같은 것을 선물했다. 박태준은 그것을 한 번도 쓰지 않았지만…. 박정희가 서거한 뒤 박태준은 13년을 더 포스코를 이끌어 제철보국의 거대한 꿈을 실현했다. 스스로 울타리 역할까지 해내면서 기어코 박정희와의 약속을 지켜냈다. 학자들이 규명했지만, 포스코의 대성공(제철혁명)은 한국 산업화의 견인차가 되었다. 제철혁명은 산업혁명과 안보혁명의 하위개념이지만, 제철혁명이 성공하여 산업혁명과 안보혁명도 성공할 수 있었다. 또한 산업화 성공은 민주화 성장의 물적 토대를 제공했다. 박정희의 혜안이 없었다면 포항제철의 박태준은 없었고, 박정희와 박태준의 특별한 신뢰관계가 없었거나 박태준이 없었다면 제철혁명의 대하드라마는 대성취를 거둘 수 없었다. 여기에 박정희와 박태준의 `위대한 만남`의 시대적 실체가 있으며, 박태준은 박정희 서거 후 13년이 지났을 때든 32년이 지났을 때든 한결같은 마음으로 `위대한 만남`을 아름답게 가꾸었다.

학자들은 박태준의 정신을 무사심(無私心)과 순명(殉命)의 애국주의로 규명했다. 내가 보기에 그의 강고한 신념에는 `박정희와의 약속`도 담겨 있었다. 2003년 가을, 광양이었다. 막걸리로 반주를 삼으며 긴 대화를 나누었다. 문득 박태준이 말했다. “내가 포스코에서 딴생각을 했다? 그러면 죽어서 박 대통령과 만났을 때 창피해서 이거 한 잔 나눌 수 있겠소?” 나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자기 맹세 같았다. `딴생각`은 `검은 돈`이고 `이거`는 `막걸리`였다. 포스코의 주식을 한 주도 받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한 박태준이 만약 박정희 서거 후에라도 `딴생각`을 품었더라면 두 인물의 만남은 `위대한 만남`의 종착역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떠난 자의 뜻과 남은 자의 뜻이 끝까지 일치한 점, 이는 `위대한 만남`의 화룡점정이다.

2011년 12월 13일 숨을 멈춘 박태준은 32년 전부터 박정희가 기다린 동작동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해 11월 14일 박정희 동상 제막식에 가서 축사할 예정이었지만 정작 당일엔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던 박태준. 그의 유고 연설에는 이런 문장이 담겨 있었다. “그리운 각하, 이제는 저의 인생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재회하여 막걸리를 나누게 되는 그날, 밀리고 밀린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어놓겠습니다. 며칠은 마셔야 저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는 마칠 것 같습니다. 부디 평안히 기다려 주십시오.” 과연 박태준의 소박한 소망은 이루어졌을까? 하느님의 귀는 늘 열려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태준이 설립한 포스텍, 저승의 재회 술자리에서 박정희가 틀림없이 “임자, 아주 잘했어!”라고 상찬했을 그 포스텍이 내일(2013년 2월 15일)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를 개소한다. 설립 취지문에 이런 다짐이 있다. “선생이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모든 분야에 대한 지식인의 연구의욕을 고취하고 그 성과들을 지식사회가 공유하여 미래전략과 담론을 창출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것이며, 시대정신의 개척자가 될 것임을 천명한다.” 이 선언을 실현할 때, 틀림없이 박태준은 대단히 기뻐할 것이다. 이 연구소가 `위대한 미래`로 나아가는 한 거점과 지혜의 산실로 성장하기를!  /이대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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