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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에서 고대 신라를 만나다

윤종현기자
등록일 2013-02-01 00:10 게재일 2013-02-01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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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3일 경주서 `우물을 통해 본 신라인의 일상` 학술대회
▲ 신라 재매정이나 고구려 백제의 우물이 원통형 지하 부분 위에 지표 위로 정자 모양의 네모난 틀을 짜놓았는데 그것이 첨성대 꼭대기 모양과 동일해 첨성대는 우물을 지상에 올려놓은 형태를 띠고 있다는 주장이 지난 1998년 제기되기도 했다.

`우물`은 우리 전통사회에서 사람들의 생활에 있어 필수적인 식수와 생활용수를 공급해주던 역할을 했던 `설비`다. 하지만 우물의 성격과 기능은 이런 생활상의 `필요`라는 실용적인 면을 넘어 중요한 신화적, 상징성, 사회적 기능 등 다양한 성격을 띠고 있다. 이와관련, 경주시가 오는 5월3일 `우물을 통해 본 신라인의 일상` 학술대회를 앞두고 옛 사람들의 삶터인 우물의 기능을 짚어본다.박혁거세의 `나정`·왕비 알영의 `알영정` 등 통치인물 탄생장소

마을 공동체 구심점 역할에 `치병·재생 공간` 상징성도 가져

▲ 임해전지 우물.

□우물의 신화적 상징

권태효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사는 “우물은 실용적인 면을 넘어서 중요한 신화적,민속적 표상을 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물은 신라의 박혁거세 신화나 고려의 왕건신화 등 우리 건국신화에서 건국시조의 탄생과 관련 중요한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박혁거세의 탄강장소는 나정(井)이라는 우물가이고,그의 비(妃)인 알영은 알영정이라는 우물가에서 나온 계룡(鷄龍)에 의해 출생했다는 설화가 있다.

그리고 고려왕조에서도 작세건이 아내로 데려온 서해용황의 딸 용녀도 역시 우물을 통해 서해용궁을 왕래했다고 한다.

따라서 우물은 `건국시조`를 섬기는 제의식 장소나 또는 건국시조와 관련 신성한 곳이라는 의식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치병(治病)이나 재생의 공간이라는 중요한 상징성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우물은 왕이 물을 관장하는 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으로 인식됐을 가능성도 있다. 이를 입증하는 것은 홍수나 가뭄을 조절하지 못하여 오곡이 제대로 익지 못하면 흔히 그 허물이 왕에게 돌아가 왕을 바꾸거나 죽었다는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 기록돼 있다.

▲ 경박우물 상석.

□우물의 사회적 기능

조선왕조실록에는 전 왕조에 걸쳐 각 지방의 우물에 관한 상황을 기록하면서 수량의 풍부함으로써 읍성을 쌓을 것인지 여부를 정하는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

`물이 식량`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물은 마을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젖줄로서 그 사용과 관리 전반에 걸쳐 공동체의 원리가 반영돼 있다. 따라서 우물의 축조에서부터 사용 및 관리에 이르기까지 공공의 행사로 진행되었고,이를 위해 마을에서는 우물계(井契)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우물을 둘러싼 주술적 담론과 민속제의는 우물이 지닌 신성성과 생활의 필요성이 어우러진 민간 의식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우물을 관리하는 방법으로 `우물은 덮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즉 우물이 하늘을 봐야 하는 이유는 하늘의 은하수가 내려와 맑은 우물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특히 우물은 옛 사람들의 `소통의 장`이었다. 우물가는 마을 여성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마을 정자나무가 남성들의 소통공간이라는 우물가는 여성 전용공간이었다. 여기에서 여성들은 정보를 교환하고,주변의 눈치를 보지않고 마음껏 웃고 떠들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이를 두고 `동네방송국`, `소문의 원천지` 등이라 부르는 언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밭을 갈아 밥을 먹고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신다(耕田以食 鑿井以飮)`, 정(井)에 따라 시(市)가 이뤄지는 데서 시정(市井)이라는 말이 나왔다.

▲ 신라의 김유신 장군 집에 있던 우물 사적 제346호 재매정(財買井) .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이 일대가 장군의 집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첨성대가 우물이다?

조경학자 조세환씨는 지난 1998년 첨성대를 우물이라는 주장을 했다. 신라 재매정이나 고구려 백제의 우물 형태도 원통형 지하 부분 위에 지표 위로 정자 모양의 네모난 틀을 짜놓았는데 그것이 첨성대 꼭대기 모양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첨성대는 우물을 지상에 올려놓은 형태를 띠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 이같은 주장이 설득이 있는 것은 첨성대에 관한 정확한 역사적 문헌이 없기 때문이다.

▲ 분황사 모전석탑 뒤에 있는 석정은 경북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돼 있다.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분황사 석정의 겉모양은 팔각이고 내부는 원형이다.

□신라 우물

신라시대 때는 우물이 신성한 곳이다. 바다에서 들어오는 통로이다는 것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의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권태효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신라 우물은 건국시조의 탄생과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리를 하면 우물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인물이 출생하는 신화적 공간이라는 상징성은 반드시 국가 아니더라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왕위에 등극하는 경우라든가, 심지어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가져다줄 민중의 영웅이 변혁을 꿈꾸는 장소로도 등장한다.

따라서 우물은 새로운 국가 또는 새로이 세상을 통치할 인물을 탄생시키는 장소로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신라의 우물로 나정과 알영정 외에도 요내정, 천관사정, 분황사정, 금광정, 궁정, 금성정, 추라정,양산정, 왕궁정, 재매정이 등장한다. 다른 우물은 모두 궁궐,사찰, 산에 있는데 재매정만이 개인 집에 있다. 왜 개인 집의 우물 이름으로는 재매정만이 삼국사기에 기록될 만큼 신라 당대에 널리 알려져 지금까지 실물과 함께 전해오는 것일까. 그것은 박·석·김씨 신라 왕들의 시조 우물이 나정인 것처럼 재매정은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신(新)김씨 김유신의 집에 자리잡은 우물이었기 때문이라는 학설도 있다.

경주/윤종현기자 yjh0931@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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