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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털기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2-12-10 21:39 게재일 2012-12-1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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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시 자체보다 시인의 말이 더 시적일 때가 있다. 이정록 시인의 시집`정말`을 두고 하는 말이다. 멀리 있는 친구가 소설집 한 권과 함께 보내주었다. 시집을 읽을 때 나는 시인의 서시나, 추천자의 발문 등을 먼저 읽는 편이 아니다. 선입견이 생기거나 감흥이 깨질까봐 본문부터 읽어 내려간다. 한데 이번에는 왠지 맨 마지막 장의 `시인의 말`부터 눈에 들어왔다.

`쓰는 게 아니라 받아 모시는 거다. 시는, 온몸으로 줍는 거다. 그 마음 하나로 감나무 밑을 서성거렸다. 손가락질은 하지 않았다. 바닥을 친 땡감의 상처, 그 진물에 펜을 찍었다. 홍시 너머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사랑의 주소는 자주 바뀌었으나, 사랑의 본적은 늘 같은 자리였다.` - 전문을 옮겨 보았다. 독자와의 인사 격인 `시인의 말` 정도는 풀어써도 누가 뭐랄까. 한데 아무리 봐도 본문 시편들보다 더 시적이다. 말을 늘이지도 않고, 감성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담백하고 간결한 몇 마디에 진한 여운이 남는다.

이정록 시인은 문장 털기에 능하다. 말(言)들이 달린 나뭇가지를 마구 흔든다. 다 털려 나목의 상태여도 좋고, 잎새나 꽃잎 몇 장 달려 있어도 괜찮다. 그렇게 끝까지 살아남은 말씀만 주워 담는다. 그것이 알짜배기 문장이다. 떨어진 잎과 날아간 꽃잎일랑 미련두지 말자. 그건 읽는 자나 쓰는 자의 몫으로 남겨두자. 필요한 형용사나 긴요한 부사는 숨겨뒀다 아껴 쓰자. 그래도 읽는 이의 마음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

웃음을 말하지 않는데도 입꼬리가 올라가고, 심장을 쥐어짜지 않는데도 가슴이 따끔거리는 것. 그것이 매혹적인 문장의 기본이다. 온갖 키치적 깃털로 장식하는 문장보다 담대하게 탈탈 털어버린 문맥들이 더 아름다울 때가 많다. 일견 무색, 무취, 무미하게 보이는 문장의 깊이와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면 당신은 이미 `문장 털기`의 기분 좋은 노예가 되었다. 시인의 말을 옮겨 적는 내 손끝 역시 기분 좋은 예민함으로 떨리고 있다.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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