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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방식

등록일 2012-11-26 21:45 게재일 2012-11-26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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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숫자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는 부류이다. 고등학교 때 미적분이 뭔지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는 과외 금지 시대였기 때문에 사교육 열풍도 없었다. 해서 몇몇을 제외하곤 다들 나처럼 고만고만한 수학 실력을 자랑(?)했었다. 요즘 같으면 어림없는 얘기다. 아직도 꿈속에선 수학 때문에 힘겨웠던 학창시절을 자주 만난다. 수학 또는 숫자에 대한 이런 내 트라우마를 이해 못하는 아들딸 때문에 가끔 서운할 때가 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숫자나 퍼즐 맞추기 게임이 나오자 아들과 딸은 신이 났다. 숫자나 도형의 조합을 위해 저토록 골머리 썩는 게 재밌다니 나로선 이해불가이다. 내가 유도하는 대화에는 시큰둥하다가 하잘것없어 뵈는 숫자 놀이에 몰입하는 걸 보니 영 마뜩찮다. 오랜만에 모였는데, 내가 낄 자리는 없다.

오전에 참석했던 한 특강 중`3 +4 = ?`와`? +? =7`이 부분이 떠오른다. 어떤 이는 정답이 딱딱 떨어지는 사유체계를 좋아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정답이야 비록 정해져 있더라도 그 길로 가는 여러 방식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전자의 경우 애매모호한 것을 못견뎌한다. 그들은 정답이 두 개 이상 있어 뵈는 언어 영역을 싫어한다. 정답이 시원하게 나와야 안심이 되는 수학 과학 같은 과목을 좋아한다. 나 같은 이는 그 반대다. 수학적, 과학적 사유 체계를 경험한 적이 거의 없으니 그런 건 생각만 해도 갑갑하고 두렵다. 대신 여러 생각이 가지치기하는 인문학적 책 읽기에서는 위안도 받고 소화하기도 쉽다.

나와 성향이 완전히 다른 아이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지만 그들 또한 내가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일 게다. 가르치거나 강요한다고 성향이 굳어지는 건 아닌가 보다. 후천적 영향이 있긴 하겠지만 아무리 봐도 성향은 선천적인 게 더 강한 것 같다. 그 선천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명랑한 소통을 모색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하다. 식구끼리도 충분히 다를 수 있고, 그건 틀린 게 아니니까.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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