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의 후보 단일화 선언 후 한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대선 정국이 전개되고 있다. 이번 대선의 특징 중의 하나는 각종 언론매체에 과거 어느 때 보다 많은 정치 평론가들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야구나 축구 경기에서 해설가들이 경기의 재미를 더해주듯이 정치 평론가들도 복잡한 대선 구도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통해 유권자들의 정치적 식견을 높여주고 있다. 방송매체들은 경쟁적으로 인기 있는 정치 평론가들을 영입해 시청률을 높이고 일부 인기 평론가들은 겹치기 출연까지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평론가들의 수적 증가와 역할증대는 참여민주주의의 소중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지식인들의 반정부적 발언은 공안당국의 감시 대상이 됐고, 당시 지식인들의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은 철저히 통제됐다. `침묵이 황금`이 됐던 그 시절에는 관제 언론과 관제 해설만이 난무했다. 로버트 달( R, Dahl)이 말하는 정치는 결국 `정치적 무관심층을 정치적 관심 층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며, 오늘의 정치 평론가들의 등장은 정치사의 당연한 귀결이다.
대선 정국에서 이들 평론가들의 역할 증대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정치 평론가들은 `정치적 동물`인 인간에게 정치에 관한 관심과 흥미를 촉발시키고,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선 후보들의 공약을 해설·평가 할뿐 아니라 대선 판세를 전망하기 때문에 정치판의 흥행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의 정치 해설이나 평론이 대선 정국에 미치는 영향력이 적지 않다. 결국 이들은 정치 현안에 대한 무관심층과 정치적 냉소주의자들에게까지 정치에 관심과 참여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그 역할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곳곳에는 이들의 역할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최근 인터넷에는 어느 정치 평론가의 친권력적인 행각이 화제가 되고, 그의 퇴출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의 주장이 평론의 생명인 객관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대선정국에서 친박성향이나 친야권 성향의 평론가가 비판받는 것도 당연한 이치다.
물론 평론가도 자기의 가치나 이념에 따라 지지하는 후보나 정당은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공중파 방송에서 자신의 입장을 여과 없이 표출하는 것은 평론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해치는 일이다. 어떤 평론가는 통계나 사실적 근거도 없이 선동적인 자기주장만 표출해 빈축을 산적도 있다. 정치 평론가들의 평론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정치 평론이라는 영역은 아직도 역사가 일천하다. 우리가 미국의 저명한 찰리 쿡이나 레이첼 매도같은 정치 평론가를 하루아침에 기대할 수는 없다. 우선 이 나라의 정치 평론가들은 우선 자신들의 책임이 막중함을 인식해야 한다. 정치 평론가들은 평론이 전문적 정치 지식을 우리의 현실정치에 접목해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힘든 작업임을 철저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정치 평론가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신념을 앞세우기 보다는 자신의 선택이나 주장에 대한 객관성과 공정성부터 확보해야 한다. 정치 평론가들의 사실(fact)에 따른 그들의 가치(value) 판단이 유권자의 정치적 혼동을 줄이고, 합리적인 정치 참여를 유도하는 길임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 선거에서 정치적 판단과 선택은 해설자의 몫이 아닌 시청자나 독자의 몫이기 때문 더욱 그러하다. 정치 평론의 수준이 참여민주주의 수준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