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에도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이웃 중국에서는 `붉은 수수 밭`의 작가 모옌이 노벨 문학상 수상소식에 기뻐하고 있다. 일본은 야마나카 신야 교수의 만능 줄기 세포로 노벨 의학·생리학상 수상으로 축제 분위기이다. 아직까지 노벨 학술상 수상 경험이 없는 우리로서는 부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다. 차제에 우리도 이웃사촌이 논사면 배 아픈 심정이 아니라 노벨상 수상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노벨상은 세계인이 참여하는 학문과 지식 올림픽이다. 1901년 상이 제정된 이후 41개국에서 이미 830명의 개인과 23개 단체가 수상했다. 물리학, 화학, 생리학 및 의학, 문학, 평화, 경제학 6개 분야에서`인류의 복지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에 이 상이 주어졌다. 선진국도 아닌 인도나 이집트, 멕시코, 이란 등 세계 32개국에서 2개 이상의 노벨상을 수상하였는데,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을 제외하면 단 1명의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하였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벨상도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그 나라의 국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GDP 규모면에서는 세계 10위권이다. 우리는 지난 런던 올림픽에서는 일본을 누르고, 세계 5위라는 위업을 남겼다. 케이 팝을 중심으로 한류가 세계 곳곳을 누비고, 최근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연속 2위에 랭크되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국력이나 문화적 콘텐츠를 볼 때 노벨상 한두 분야의 수상은 당연한데도 그것이 실현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차제에 노벨상 수상을 하지 못하는 원인부터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 아시아 이웃 나라의 노벨상 소식에 배아파할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교육·연구 풍토부터 찬찬히 점검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유별난 교육열은 유태인 못지않고, 대학 진학률은 세계 최고라고 자랑하지만 사실 우리 대학의 수준은 아시아권에서도 중국, 홍콩, 싱가포르에도 훨씬 뒤져 있다. 우리의 연구 풍토 역시 한국인들의 조급성과 맞물려 장기적인 기초 연구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러한 교육·연구 풍토에서 노벨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주장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노벨상을 위한 장기적인 포석을 마련하고, 정부의 기초 과학에 대한 대폭적인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 세계 최고인 32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미국은 전체 GDP의 50%를 기초과학에 투자했다. 일본도 이미 2001년 과학 분야에서 50년내 30명의 노벨상 수상을 목표로 구체적인 계획을 공포했다. 이번 일본의 야마나카 교수의 업적도 그 성과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전체 19명의 노벨상 중 11명의 수상이 2000년 이후 노벨 과학상에 집중된 것은 기초 과학에 대한 국가적인 투자의 결과이다. 우리도 이를 위해 교육부에 통폐합된 과학기술부부터 독립부서로 승격시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 방안을 시급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일선 대학이나 연구 기관의 연구 풍토도 바꾸어야 한다. 대학의 연구 풍토는 국가의 정책에 의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특히 과학 분야에서는 한 우물 파기 식 장기연구가 축적돼야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몇 해 전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도 조급한 한국적인 연구 풍토가 빚어낸 비극이다. 신자유주의적 조급한 경쟁구도가 우리의 대학 연구실까지 파고들어 악순환적 연구 분위기가 조성될 때 노벨상은 더욱 멀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연구자들의 피나는 노력과 정부의 정책적인 노력이 합치돼야만 비로소 대망의 노벨상이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