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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노무현 비서실장→민주당 대선후보로

박순원기자· 일부 연합
등록일 2012-09-17 21:11 게재일 2012-09-17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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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후보는
▲ 변호사 시절 문재인.1987년 9월 24일 촬영.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 후보가 16일 제1야당의 정권 재탈환을 위한 대표주자로 선출됐다.

1년 전만 해도 그가 대선 주자의 지위에 오르리라고 본 이는 많지 않았다. 정치인의 삶을 원치 않았던 문 후보가 현실정치에 뛰어들 것이라고 예상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문 후보가 대선후보로 오른 데에는 `노무현 후광`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제는 `노무현의 비서실장` 이미지를 넘어서야 하는 과제가 놓여있다. `노무현의 가치`를 뛰어넘는 `문재인의 시대정신과 비전`으로 민심을 얻는 일이 남아있다.

◇유신반대로 구속..특전사 복무=문 후보는 1953년 1월 경남 거제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경도 흥남이 고향이던 부모가 6·25 전쟁 발발 후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잠시 난을 피한다는 생각으로 월남한 것이 남한 정착으로 이어진 것이다.

문 후보는 경남중·고를 거쳐 1972년 경희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중고교 때 별명은 `문제아`였다. 이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술·담배를 입에 대고 4번의 정학을 받은 문제학생이기도 했다.

대학 시절에는 `반유신` 투쟁에 나선 운동권이었다. 1975년 학생회 총무부장으로서 시위를 주도하다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문 후보는 석방되기 무섭게 강제징집돼 특전사 수중폭파요원으로 복무했다.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 미루나무 제거조에 투입될 정도로 `정예용사`였다.

그는 1978년 제대후 사법시험을 준비해 이듬해 1차에 합격했다. 그러나 79년 부마항쟁과 10·26, 80년 `서울의 봄`을 거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또다시 구속됐다. 2차 시험 합격소식을 들은 장소는 유치장이었다.

▲ 문 후보가 아내와 함께 군에간 아들을 면회할 때 모습.

◇노무현과의 만남..인권변호사 길로=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한 문 후보는 판사를 희망했지만 시위 전력 탓에 좌절됐다. 변호사 길을 작정하고 부산으로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노무현 변호사였다.

첫 만남에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동업을 결정했다.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며 관행이었던 사건 알선 브로커를 끊고 판·검사 접대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저서 `운명`에서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기꺼이 맡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고 술회했다.

1988년 4월 노무현 변호사는 13대 총선에 출마해 정치권에 진입했다. 문 후보는 부산에 남아 노동관련 사건 변호나 노동운동 지원 일에 매달렸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 대선 경선 때 문 후보는 노 후보의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아 `업무적으로` 다시 결합했다. 당시 노 후보는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며 깊은 정을 표현했다. 문 후보는 “노 후보가 당선되던 날은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이었다. 영원히 계속됐으면 싶은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 문 후보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 상주역할 모습.

◇청와대 왕수석..마지막 비서실장=대선이 끝난 후 노 전 대통령은 문 후보를 붙잡았다.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가게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다.

문 후보는 청와대 생활의 시작과 끝을 노 전 대통령과 함께했다. 2번의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이 그것이다.

그는 민정수석 사퇴 후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섰지만, 현지 영자신문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해 변호인단을 꾸렸다.

탄핵 심판이 기각된 뒤 그는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다가 2005년 1월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참여정부의 마지막 해인 2007년 3월 비서실장을 맡았다.

◇정치인 변신후 대선주자까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때 그는 국민장의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아 장례 전반을 관장했고, 이후 노무현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았다.

그는 2009년 10월 경남 양산 재보선 국회의원 후보, 2010년 6·2 지방선거 부산시장 후보로 거론됐지만, 한사코 현실정치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야권 대선주자들의 지지율이 제자리를 맴돌면서 문 후보의 등판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아졌다. 작년 6월 자서전 `운명`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면서 문 후보를 향한 정치참여 압박은 거부하기 힘들 정도가 됐다.

결국 정권교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작년 말 `혁신과통합`을 통해 야권대통합에 참여해 민주통합당 창당에 일조했다. 또 지난 4·11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나와 당선된 후 대선후보의 길로 들어섰다.

항상 따라다니는 `노무현의 비서실장`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대통령 후보 문재인`을 각인시키는 것도 과제다. 같은 맥락에서 `친노의 수장` 이미지를 극복하고 당내 화합과 국민통합을 위한 포용력을 발휘하는 것 역시 그의 앞에 놓인 시험대다.

/박순원기자· 일부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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