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조직에서는 나누기를 주관하는 기구가 있다. 이것은 편중된 자본을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재분배하는 모임이나 기관들을 말한다. 가난을 여러 제도로 보완해서, 구출하려고 하는 것으로, 이것을 복지 조직체라고 한다.
일반 종교단체에서도 복지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사랑이나 자비 등은 복지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것이다. 불우한 자를 도운다는 것은, 어쩌면 종교의 핵심 요소가 될 수 있다. 특히 재물에 대한 종교의 태도는 수학에 나오는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중에서, +나, ×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 대신 -와, ÷를 가르친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사랑으로 충만해 빼어주거나, 나누어 분배하기를 권한다. -와 ÷는 인생에서 무거운 자기의 등짐을 줄여 준다. 종교에서는 이런 행위를 하늘에 계시는 신에게, 한발 한발 가까이 오르는 단계로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신을 더 알게 되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꼭히 물질의 양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서는 가난을 물질의 부족으로 보고,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켰다. 또 초기의 기독교에서는 가난할수록 하늘나라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헬라어 원문으로 `가난`은 푸토코스라고 한다. 이 말은 쭈그리고 앉다, 웅크리다는 뜻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이었던 `터툴리언`은 가난을 `거지`로 번역했다.
과거에 유럽에서는 성 프란시스라는 재력가가 있었지만, 그는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재물을 사회에 희사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그를 성빈(聖貧)이라고 불렀었다. 그는 `가난은 자기 아내요, 죽음은 누님과 같다`고 했다.
기독교에서도 물질적인 가난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난과는 적이 되어 싸웠다. 왜냐하면 사회가 가난하다면, 부는 소수에게 쏠렸다는 말이다. 그러면 백성을 가난뱅이로 만들고, 전쟁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의 가난은 주로 `영적인 가난`으로 다루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마음에 무엇이든지 가득 채워져 있으면 부자로 본다. 부자인 그의 마음은 적개심, 분노, 저주, 욕망, 이기심 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그 가득 찬 것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지 못한다고 했다. 이것들을 비워야 가벼워지고, 좋은 것을 넣을 수 있다.
특히 돈도 없으면서 마음마저 뭔가로 가득 차 있으면, 그는 정말 `불쌍한 자`이다. 그 반대로 어떻게 보면 부자들 중에서도 마음이 비어있는 사람이 많을 수 있다. 성경에도 니고데모, 아리마데 요셉, 고넬료, 루디아 등 믿음이 좋은 부자들도 많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여덟가지 복중에서 `마음을 비워야, 가난해 져서 복이 있다`고, 이것을 제일 앞에 두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면, 하나님이 복을 준다`고 하지 않았다. 그냥 `~면 복이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복은 자기의 노력으로 찾는 것이지, 누가 주어서 선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가난하게 살면, 그는 항상 의(義 )와 기쁨과 평안 속에서 생활이 가능하다. 그는 나눌 줄 알고,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인다. 종교는 우리에게 인생을 이런 식으로 살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