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이광수가 출생한 1892년에 태어나 일본 근대소설사의 문제작들을 남기고 36세의 새파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茶川龍之介). 이 작가를 한국문학 연구자들은 종종 「날개」의 작가인 이상(李箱, 1910~1937)과 비교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일본문단의 `아쿠타카와문학상`과 한국문단의 `이상문학상`도 서로 짝을 이루는 셈이다.
아쿠타카와의 초기작 중에 `지옥변(地獄變)`이 있다. 당대 최고의 화공(畵工)인 요시히데는 교만하고 방자한 인격의 소유자다. 그러나 자신의 그림에 대한 집착은 집요하다. 작중에서 `오취생사(五趣生死)`라는 그림을 그릴 때는 길바닥의 시체 앞에 앉아서 그대로 옮겨왔다. 그 그림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나더라는 말들이 나돌 정도로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어느 날에는 영주가 그에게 `지옥변`이라는 병풍을 그리라는 분부를 내렸다. 그림의 완성을 앞두고 그가 영주에게 하늘에서 비단수레를 탄 궁녀가 불길 속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괴롭게 몸부림치는 장면을 그려야 하는데, 그런 장면을 실제로 보고 싶다고 아뢰었다. 자신은 무엇이든 자기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고는 그리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청을 받은 영주는 어떻게 했을까? 아쿠타카와의 소설적 설정은 자신의 예정된 자살을 암시하는 방식이었다. 영주는 그의 청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런데 궁녀로 분장시켜 불에 태워 죽이는 처녀는 바로 요시히데의 딸이었다. 당대 최고의 화공은 사랑하는 딸을 태우는 불길에서 마지막 영감을 얻어 생생한 그림을 완성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한국사회의 어떤 개인이든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을 당당히 밝힐 수 있다. 천안함 폭침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개인이 술자리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작가나 화가가 작품 속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재야단체가 그런 내용의 성명서를 낼 수 있다. 천안함 폭침사건과 관련된 유언비어를 인터넷에 올렸다가 기소 당한 피고인의 변론을 맡은 변호사가 법정에서 그런 종류의 주장으로 검사와 맞설 수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한국체제는 북한체제보다 훨씬 좋은 제체이고, 이것 하나만으로도 한국체제는 북한체제를 훨씬 능가하는 경제와 민주주의와 문화예술의 성장을 추구할 수 있었다. 표현의 자유가 없는 체제는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사는 숱하게 실증해주지 않는가.
개인 조용환, 변호사 조용환, 민변 대변인 조용환은 그렇게 말해도 좋다. 그러나 헌법재판관 조용환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헌법이란 무엇인가? 헌법은 국가의 정체성이며 국가의 존립 근거이다. 법치주의를 수용하는 한, 헌법은 법률 조항의 집합체가 아니다. 국가의 정체성과 존립 근거를 명문화한 하나의 경전이다. 헌법재판관은 숱한 하위법률들이 `헌법에 일치냐 불일치냐`의 시비만 가려내는 존재이다. 그래서 헌법재판관은 천안함 폭침사건에 대하여 “정부의 발표를 신뢰하므로 북한의 소행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표현하든가 “정부의 발표를 신뢰할 수 없으므로 북한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해야 한다.
헌법재판관이 아니라 판사라고 해도 그렇다. 가령, 미궁에 빠졌던 살인사건이 국과수의 과학수사에 의거하여 범인을 체포하게 되었다고 하자. 판사가 국과수의 과학적 증거자료들에 대하여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서 믿을 수 없다”고 판결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국과수의 증거자료들을 믿을 수 없다”라고 해야 옳지 않는가?
조용환 변호사는 헌법재판관이 되어 개인과 가문의 영광을 얻고 싶은(또는 제도권 내부에 진입하여 이념적이고 신념적으로 실천할 기회를 얻고 싶은) 한편으로 진보세력의 지지를 잃지 않으려는 이중플레이 심리에서 “정부의 발표를 신뢰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서 확신할 수 없다”라고 발언한 것은 아니었을까? 장관 청문회에 나온 후보자들의 `위장전입`에 대하여 그토록 매섭게 비판한 당사사로서 자신은 네 번씩이나 위장전입을 해놓고 청문회에 나선 것도 어처구니없으려니와, 이제라도 그는 스스로 추천을 반납하고 민변 대변인이나 그냥 변호사로 살아가는 것이 헌법과 시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