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속도를 가늠하며 향유하는 것은 인간이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인간이 뚫은 길이 시간의 주인 아닐까. 길과 친구가 되다보면 길은 분명 속도를 끌어안고 있는 공간임을 실감하게 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란 말처럼 나라마다 사통팔달(四通八達)로 뚫린 도로망을 발전의 본보기로 들기도 한다. 도로가 잘 뚫려 있으면 속도도 빠르고, 물동량의 이동도 용이할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길과 이어진 살림살이도 윤택해지니 그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5월 여유로운 주말 하루 잘 닦여진 고속도로의 속도를 버리고 그야말로 옛날식으로 칠백 리 길을 이동했다.
차로 움직이며 목적지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하면 내비게이션은 고속도로 요금까지 안내하며 빠른 길로 인도했다. 참 똑똑한 내비 녀석의 지름길 안내는 지독한 유혹이라서 결국 끌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지도를 훑어보며 옛길로 운행하다보니 주변의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길가 문화유적안내판을 보고 일부러 들어가 구경도 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세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를 무려 여덟 시간이나 걸렸다. 그 여덟 시간 안에는 내가 처음으로 가본 곳이 여러 곳 있었다. 그러니까 으레 빠른 길로 선택하면서 들러보지 못했던 우리 역사의 누적된 시간(문화유산)을 새롭게 만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 중 상주 사벌면 퇴강리에 있는 `퇴강성당`과 의성의 고찰 `고운사`는 내게 너무 인상적이었다.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퇴강성당은 101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천주교 안동교구 소속의 성당으로 1899년 세 명이 세례를 받은 이후 지난 해까지 44명의 성직자와 15명의 수도자를 배출한 오래된 성당이다. 고딕식 붉은 벽돌로 지어 근현대 교회 건축사에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502호로 지정되었다. 살며시 엿본 성당 내부는 그야말로 오래된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매주 한번 발행하는 주보에 적힌 주일 신자와 헌금을 보면서 농촌의 살림살이까지 훔쳐볼 수 있었다. 주일신자 52명에 헌금은 95,000원. 도시의 작은 개척교회보다 적은 헌금이지만 교회는 참 아름답고 깨끗했다.
의성 고운사는 익히 이름은 알고 있었으나 처음 찾은 절이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 그 절 산하에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에 산재한 60여 대소사찰을 관장하고 있는 절이다. 특히 안동의 봉정사라든지, 영주의 부석사가 고운사의 말사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는 사찰의 역사를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고운사는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한지 10년째인 681년 창건한 절로 최치원이 이곳에서 가운루(경상북도 무형문화재 151호)와 우화루를 지어 그의 호를 따 고운사라 부르게 되었단다. 보물 제246호인 석조석가 여래좌상도 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사명대사의 발길도 머물렀던 곳이었음을 그곳을 찾으며 알게 됐다.
퇴강 성당과 고운사를 만나며 느린 속도 속에는 많은 시간이 스밀 수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내가 만약 고속도로를 선택해서 움직였다면 두 곳은 아직도 나에게 갈 수 없었던 낯선 풍경으로 머물고 있을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되고, 바보처럼 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종종 늦은 속도를 일부러 내 삶의 앞쪽에 둔다면 그 자체가 우리 삶을 풍부하게 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하는 일 아닐까.
한 발 여름으로 들어서는 날씨다.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에 느림의 아름다움을 곁에 둔다면 두꺼운 역사의 시간을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은 분명 향기(香氣) 있는 행복한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