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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사대주의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11-06-30 23:31 게재일 2011-06-3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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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창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장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아름다운 시를 썼던 김영랑 시인은 전남 강진의 갑부였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에 고향집에 살면서 시를 썼다. 당시에 지식인들은 능력을 갖추었지만 취직을 하지 않았다. 일자리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일자리라는 것이 대개 조선총독부 등의 일본 식민지 통치를 돕는 일자리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반듯한 일자리를 얻으면 그것이 곧 친일파로 가는 길이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정부에서 영랑은 교육부 관료가 되었다. 어느 날 교육부의 상급자로부터 영랑은 한글맞춤법을 소리 나는 대로 적도록 바꾸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영랑은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각하가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영랑은 술상을 엎고 교육부 국장직을 그날로 그만두게 된다.

이승만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우수한 두뇌를 가졌지만 오랜 미국 생활로 우리말과 우리글에 서툰 사람이었다. 한글맞춤법은 소리 나는 대로 적는 표음주의와 쉽게 뜻을 알 수 있도록 쓰는 형태주의를 함께 적용하고 있다. 소리 나는 대로 적는 다는 것은 `말씀이`라 적지 않고 `말쓰미`로 적는 것을 말한다. 소리 나는 대로 적으면 읽는 사람이 문장의 뜻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그런 말에 한해서 실질형태소를 밝혀서 적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글맞춤법이 어렵다고 한다. 우리의 각하도 한글 쓰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두뇌는 우수한 분이었지만 언어에 대한 인식은 영랑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셨다.

지금의 정권 담당자들도 우리말과 우리글보다는 영어를 더 중요시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감히 영어 몰입교육이라는 말이 있다. 영어에 모든 힘을 집중하는 모양새다. 영어 교육을 위해 외국인을 초빙하고, 영어학원에 자녀를 보내고, 학교에서는 영어전용교실이라는 것을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어학연수라는 이름으로 영어를 배우기 위해 외국에 유학을 간다. 이렇게 영어를 배우기 위해 투지되는 돈이 천문학적 숫자라고 한다. 소설가 이외수 씨가 현대통령이 방명록에 쓴 글에서 맞춤법에 틀린 부분을 지적하여 누리집에 올린 일이 있었다. 우리의 통치자들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아직까지 한글에 서툴다. 영어에는 천문학적 돈을 들이지만 국립 국어원의 1년 예산이 100억 원 정도라고 한다. 영어에 투자하는 것의 십분의 일이라도 국어에 투자했더라면 우리의 통치자들이 맞춤법을 제대로 몰라서 체면을 구기는 일도 경제적 손실도 적었을 것이다.

이른바 k-팝을 부르는 우리의 젊은 가수들이 거센 한류를 일으키고 있다. 동남아시아에 이어 프랑스에서도 대단한 한류를 일으키고 있다. 프랑스의 열성 팬들은 우리말로 된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서툰 한글로 가수의 이름을 쓰고 `사랑해요`라고 쓴 표지판을 들고 열광했다. 참으로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이런 k-팝 열풍을 소개한 티브이 뉴스 끝에 어떤 행정부 관료가 한 말씀 하는 장면이 소개됐다. 이 기회에 k-팝의 가사를 영어로 바꾸어 세계화 시키면 더 많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씀이었다. 이분의 머릿속에도 국어에 대한 인식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거리의 대부분의 간판은 국적을 알 수 없는 외래어 간판으로 넘치고, 대부분의 거대 공기업 이름도 영어로 바뀐 지 오래 되었다. 관광지의 화장실조차도 한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영어공부 하지 못한 노인들은 어디에서 볼일을 보라는 말인가. 심지어 동사무소도 주민 센터로 바뀌었다. 우리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기관마저도 국어보다는 영어를 중요시한다.

사대주의(事大主義)는 주체성 없이 자기보다 강한 나라나 사람을 받들어 섬기는 태도를 가키는 말이다. 우리는 아직 사대주의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 조선 시대에는 명나라를 섬겼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을 섬겼고, 지금은 미국을 섬기고 있다. 언어에도 사대주의가 있다. 순우리말 어휘만 쓰는 사람은 지식수준이 낮은 것으로 알고 외래어 어휘를 많이 써야 자식수준이 높은 사람으로 여기는 경향이 그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우리의 정치는 사대주의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우리 국어 정책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말과 글보다 영어를 중시하는 언어의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우리가 살고 있는 언어사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라의 정책을 담당하는 관료의 입에서 k-팝을 영어로 부르자는 말이 아무런 생각 없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주시경 선생이 `말이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고 하신 말씀을 귓등으로 듣는 이들이 우리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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