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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11-06-24 23:01 게재일 2011-06-2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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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락/포항장성요양병원장
종교는 궁극적 문제를 다룬다.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가, 죽어가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등등의 삶과 죽음, 삶의 의미와 가치 등 근본적 문제를 다룬다. 또 우주의 생성, 전개, 소멸 등 첨단과학으로도 다룰 수 없는 것에도 적극적인 해답을 준다.

종교에 대한 사전적 정의에도 `종교란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삶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체계`라고 기술되어 있다.

최초의 종교는 삶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출발했다. 현실을 알 수 있다면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다. 그 두려움의 정점은 죽음이다. 인간이 완벽하다면 종교가 필요 없다. 또한 무지가 넘쳐나도 믿을 수가 없다. 어쩌면 인간은 종교의 필요성을 간절히 기다리는 정도의 정신 수준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궁극적인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에는 종교학과 철학이 있다. 철학은 궁극적인 문제를 던졌으되, 답은 유보한다. 우주의 시작과 끝은 우리의 인식범주가 아니므로, 답할 필요가 없고, 영혼, 운명, 시간, 공간과 같은 궁극적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유보하라고 한다. 이것들은 처음부터 문제가 아니며, 답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철학은 사색을 통한 표출의 세계이며, 이지적 이성적 부분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죽음과 사후 영혼의 불멸성, 운명과 의지, 제1원인인 신의 존재 등은 과학적 논쟁이 불가능하고, 경험의 대상이 아님으로 해답이 없다고 한다. 어느 철학자는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고 했다.

기독교나 불교 등 각 종교는 그 발생지역 사회의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그 사회 구성원의 생활양식에 따라, 고유한 신앙형태가 있으므로 종교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기독교는 신의 뜻에 의해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우주는 성립되었다가(成) 머물다가(住) 파괴되었다가(壞) 텅비는(空) 과정을 무한히 되풀이 한다고 한다. 또 죽음에서는 각자의 지은 업(業)에 따라, 윤회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신을 안 믿으니 종교가 아니라 하지만, 신의 유무는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신`이라 대답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이다.

종교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극복하는 법을 가르친다. 고통이라는 것을 고통해 보려고 애를 쓴다. 고통과 하나되는 순간에 종교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해결 못하는 것이 고통이다. 고통이 찾아 왔을 때, 그것이 온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이 종교이다. 종교의 목적은 그것을 해결해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한 행복, 진정으로 완벽한 행복, 그것은 고통을 해결해야 가능한 것이다.

죽음도 고통이고, 태어남도 고통이다. 또 고통은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더욱 고통스럽다. 종교란 이것이 인생임을 똑바로 보고 깨달아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종교의 믿음에는 고상하거나, 또는 천한 수준 등의 차별이 없다. 누구든지 절대의 빛을 찾으려면, 자기 주관이나 감각에 의존하는 수준을 넘어가야 한다. 빛은 프리즘을 통하면 여러 빛으로 나뉘는데, 프리즘 이전의 빛, 즉 근원적인 빛이 종교의 진리이다. 진리는 하나인데, 각 종교에 따라 설명이 다를 뿐이다.

샤마니즘도 인간의 궁극적 문제를 다루고, 사후 세계에 대한 해답을 주장한다. 그들에게도 신앙하는 무리가 있고, 굿과 같은 낮은 수준의 종교의례가 있다. 그러나 경전이 없고, 계율같은 도덕적 율법이 없는 것이 종교와의 차이이다.

종교에는 신앙하는 무리가 있고, 그들의 정서적 왜곡을 순화시키는 종교의례가 있다. 이로써 신심이 두터워 지며, 감정이 부드러워 지고 고통, 고난,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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