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땅 개성의 옛 이름은 송도이다. 송도삼절하면 황진이, 서경덕, 박연폭포를 말한다. 개성은 휴전선 방배단에서 자동차길로 1시간도 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이며 북쪽으로 바라보면 송악산이 눈앞에 들어온다. 그 밖에 개성하면 선죽교, 성균관, 만월대, 개성남대문, 범사정 등을 꼽을 수 있다. 필자도 몇 년 전 개성을 다녀와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개성의 경제계를 지배하는 원동력은 말할 나위없이 그 특산물인 인삼이다. 제국의 황혼기에 일본 상인이 한국 상인을 압도했지만 이에 가장 굳건히 대응한 상인은 개성상인, 곧 송상(松商)이었다. 고려·조선시대를 통해 항상 앞선 상술로 하나의 세력권을 이뤘던 우리 나라 대표적인 상인군(群)이다. 고려를 창건한 왕건은 송학지방의 신흥귀족의 후예로서 조상 대대로 당나라와 무역을 해왔다. 일본 상인도 두려워한 개성상인은 이재에 밝고 그 운용에 교묘하며 각종 물화를 일본 또는 서울, 인천 지방에서 구입해 사방에 행상해 이익을 얻었다. 당시 개성에 자산 1만 원 이상의 상인이 50호, 1만 원 이하의 상인이 203호나 있었다고 한다. 인삼업에 투입된 고정자금은 180여 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그 당시 서울시내 고급주택 가격이 1만 원 정도였다. 1900년대 초기에 일본 상인은 한국 상인을 거치지 않은 채 미곡을 매출하고 또 수입품을 판매해 개성상인의 세력권을 침식시키려고 했으나 각지에 고객을 가지고 그 기반이 깊고 단단하기 때문에 일본 상인이 손을 들고 말았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자 관직 진출이 어려운 관리들이 상업에 전업하고 그래서 송상은 상술에 뛰어난 인재들로 기업을 잡고 있었다. 그때 개성에는 상당한 가문의 자제도 유력 상인의 휘하에 사환으로 상술을 배웠던 것이다. 이들의 절약 정신과 검소한 습성이 투철해 “개성 상인이 지나간 자리에는 풀도 자라지 않는다”고 했다. 일본인 보다 더 근면하고 양심적인 마음이 주효한 것이다.
/손경호(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