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2 어느 날 그녀가 다니는 P여고의 전시회가 있어서 가게 되었는데 마침 그녀의 문집을 보게 됐다. 잘 다듬어진 솜씨로 예쁘게 꾸며진 그런 문집이었다. 돌아온 후 나도 문집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그것만이 동기는 아니지만 일기를 꼬박꼬박 문집처럼 쓰게 됐다. 대학시절까지 열 다섯 권 넘게 썼으니 언제나 책장에 놓고 보면 뿌듯했다. 돌아보는 재미에 글 쓰는 재미가 새록새록 늘었던 것이 생각난다. 생각하고 읽고 쓰면서 사색하는 버릇이 이때부터 키워졌는가 보다. 나의 처음 일기로 된 문집은 검정색 가죽 하드커버로 되어 있어서 매우 깊은 아름다움이 있었고 제목은 무(無)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제목처럼 속이 비어있어서 그것을 유(有)로 채워가는 그런 재미가 있을 뿐더러 늘 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데가 있었다. 주로 잠들기 전에 이 일기를 썼는데 누가 방의 불을 꺼버리면 어둠속에서 그냥 썼다. 다음날 아침 보면 괴발개발 씌어 있어도 그것 나름대로 좋았다. 결국 훈련병으로 입소했을 때도 소등 후에 일기를 썼다. 희미한 불빛에 의지한 경우였지만 하루를 마감하는 이 글쓰기는 결국 나로 하여금 시인의 길을 걷게 한 원동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처럼 정성들여 써 모아온 열다섯 권의 일기 문집을 하루아침에 불에 태워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복학한 대학에서 나를 따르고 좋아했던 후배와의 사랑과 결국 헤어짐 때문이었다. 그녀가 이 일기장에 들어있는 과거들 즉 들판을 해매이며 사랑을 나눈 첫사랑의 이야기를 보게 된 것이다. 그것이 화근이었는지 질투였는지 결국 그녀는 내게서 멀어지고 나는 이 작고도 쓰린 이별의 아픔 때문에 소중한 기록들을 불에 태워버리게 된다. 물론 곧 바로 후회했었지만 역시 앞의 짝사랑 편지처럼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내 몸과 정신 속에 그 글들은 남아 시가 되고 글이 되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옛사람들은 이런 자신의 저술이 된 문집들을 쓰다듬으며 세월을 보냈으리라. 결국 후세에 남아 출판된 것들도 있었으니 연암 선생이나 다산 선생의 문집 혹은 셀 수 없는 그 모든 선현들의 문집들이 다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글을 써서 자신을 가다듬고 다시 돌아보고 생각하며 쓰다듬는 일이 오히려 덫이 되는 경우도 있었으니 쓴 글이 빌미가 되어 사화에 얽혀 결국 유배 가는 일도 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나의 태워버린 열다섯 권의 문집은 나의 새로운 글쓰기를 위해 희생시킨 아름다운 과거들이다. 그 때 태워버리지 않았으면 내 몸속 혹은 정신 속으로 스며들지도 않았을 것들이다. “혹 글을 쓰려고 하는가? 자신이 이제껏 쓴 글을 먼저 태워 버려라! 과감히 자신이 쓴 글들을 던져 버려라!” 막 글을 쓰려고 배우는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