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울 때 도와주고, 외로울 때 놀아 주고, 곁에 있으면서 격려하고, 충고하며 인생을 더 넓은 폭으로 살게 한다. 우정이 있는 곳에는 질투, 시기, 욕, 속임이 없고, 해로운 것을 강요하지 않고, 경청하고, 용서하고, 존경과 예의를 표시하고, 말할 때는 저급한 단어를 쓰지 않는다.
우정에는 자존심을 나타내지 않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며, 그 둘은 상호 성찰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이것에서는 상대의 생김새, 욕망, 그의 역사 등을 인정하고, 신뢰가 그 바탕을 이뤄야 한다. 신뢰가 없으면 단순한 교제 수준일 뿐이다.
근래에는 남녀 간에도 우정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노소간에 견해의 차이가 많다. 어느 의견이 맞을까?
요즈음의 늙은이들은 어렸을 때, 학교나 가정에서 우정을 위해 재산을 버리거나, 때로는 부인도 희생을 당할 수도 있는 것으로 배웠고, 관포지교에서는 `나를 낳은 이는 부모이고, 이해한 사람은 관중 이었다` 고 하는 등의 동양문화에서 자랐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이는 그 반대로 서양식으로 비교적 풍부한 물질문명과 신장된 자유 속에서 자라고 있다.
옛날에는 성관계가 절대적으로 큰 문제였으나, 의학의 발달로 임신은 소소한 문제로 되어서, 성(性)에 관해서는 과거와는 거의 정 반대의 관점으로 해석을 내리는 지경에 와 있다.
노인들의 생각은 이렇다. 노인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의 남녀 관계`는 그냥 `알고 지내는 관계`일 뿐, 친구로서 우정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적어도 인생의 문제를 놓고 고민을 같이 해본 사람들에게만 우정이 가능하다고 본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친해지면 평등한 관계에서 볼 때, 친구가 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친구 같다`라는 단어는 사용해도 우정이란 단어는 쓰지 않는다.
남녀 간에는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정이 아니라 애정이 솟아오른다. 번개 같은 감성으로 사랑이 나타나서, 주체할 수 없는 성욕으로 쉽게 선을 넘을 수 있다.
남녀 간에는 우정과 애정의 경계가 애매모호하다. 남녀가 자주 만나도 애정이 없이 지낸다면 그것은 친구보다도 더 낮은 수준의 `단순한 교제`로서 우정(친구)이라기 보다는 `알고 지내는 사이`일 뿐이다. 어릴 때 소꿉친구는 남녀가 친구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는 성욕이 없을 때이기 때문이다.
애정은 뒤돌아 설 수 있지만, 우정은 영원히 지속할 수 있다. 애정에는 행복감과 도취감이 있고 때때로 거짓말과 변명이 필요하지만, 우정에는 느긋한 신뢰감으로 변명이 필요 없는 것은 이미 몸으로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돌아서면 배반이고, 우정은 돌아서면 배신이 된다.
아무리 우정이 깊다고 해도 각자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다면 신혼여행 전에 모든 것을 깡그리 마음에서 쫓아내고 새 출발을 해야 한다.
신혼 초에 동성끼리 우정을 가진 것을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 이성(異性)간의 우정을 이야기하면 들어줄 사람이 있겠는가? 그 불가능의 근본에는 충만된 성욕이 있기 때문이다. 피천득은 그의 수필에서 남녀간에는 독점욕이 있어서 결혼 순간부터 인간관계는 새로이 정리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기야 신혼부부가 `결혼 전 이성 친구가 있어도 괜찮아!` 라고 하면 나의 말은 틀린 것이 되겠지만….
`~때문에` 애정을 갖는 에로스(eros)에서, `~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아가페(agape·우정)로 남녀간의 사랑의 수준을 높이는 것은 뼈를 깎는 노력, 즉 극히 많은 자제가 필요하다. 이는 거의 종교적인 경지이다.
우정은 신뢰의 기간이 필요함으로 천천히 자라는 식물과 같다. 우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값진 것은 없다. 이는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채워 준다. 단순한 남녀의 속된 교제나 만남에 대해서는 우정이 아닌, 새로운 단어를 만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