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많이들 알고 있다시피 일제 말기 문학은 이른바 `친일문학` 문제로 더럽혀져 있다. 필자는 문학인들이 자발적으로 그러했는지, 외압에 따른 것이었는지 따져봐야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일단 일제말기 문학인들의 `대일 협력`이라는 문제로 치환해서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어느 쪽이든 일제의 전쟁 동원 논리나 서양 증오 논리에 동조했다는 것은 일종의 죄악을 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 그것은 이러한 논리가 인간적 가치나 인간성의 측면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에 대해 부정적, 파괴적, 말살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일제 권력에 의해 이런 문학을 강요받던 시대의 문학인들이 그런 노선을 따라 쓰거나 행동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한편, 그렇지 않은 문학, 문학적 보편적 가치를 옹호하고 새롭게 발견해 나가고자 노력한 작가들이 있었는지, 그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고, 분석하고, 평가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일종의 역사철학적 사유 능력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바람직한 역사란 무엇인가? 개개의 민족이나 인류 전체는 어떤 역사적 전개를 가져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판단 능력이 없이는 이 시대 문학을 제대로 다루기 어렵다. 지금 국문학계에서는 일본의 시책에 적극 협력했던 사람들의 문학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생겨난 지 오래인데, 이런 흐름을 필자는 불편한 심정으로 관조하면서 “내게는 나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공부하는 사람은 주어진 여건상 모든 문제를 다 다룰 수 없기에 공부의 대상이나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처럼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결국 무엇을 어떻게 남길 것이냐 하는 문제로 직결된다. 이 가치의 차원은 결국 세계관 또는 역사철학을 요구한다.
식민지 시대의 문학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에 답하고자 할 때 비로소 부각되는 것이 바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는 명제다. 고전적으로 보면 헤겔이`정신현상학`에서 이 문제를 제출했고, 니체와 들뢰즈는 어떻게든 이 명제를 비틀거나 전복시켜 새로운 주인과 노예의 논리를 창조하고자 했다.
헤겔은 말한다. 역사는 진정한 자기의식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런데 `나`라는 의식은 `타자`를 필요로 하며 `타자`의 인정, 승인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한 위한 투쟁에서 이기는 쪽은 주인이 되고 지는 쪽은 노예가 된다. 그러나 노예는 노예로서의 굴욕적인 노동의 과정에서 자신의 본질을 깨닫고 새롭게 독립적인 자기의식을 획득하게 된다. 이로써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이러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각 항에 `제국`과 `식민지`라는 말을 대입하면 모든 게 풀릴 것 같다. 그러나 니체와 들뢰즈는 다르게 말한다. 그들은 타자에 의해 매개되어 발견되는 자기의식이란 `노예`의 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주인`이란 타자와 비교되거나 타자라는 거울에 의해 비춰지지 않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역량을 깨닫고 이것을 발휘해 나가는 존재다.
어느 쪽 시각을 취하느냐에 따라 일제 말기 문학을 연구하는 방법이나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 꼭 이렇게 단순화할 수는 없지만, 헤겔의 입장을 따르면 노예로서의 의식, 노예로서의 노동에 초점을 두게 된다. 반면 니체나 들뢰즈의 입장을 따르게 되면 처음부터 `주인`이고자 했던 이들을 발견하려 애쓰게 된다.
이들의 입장에 서면 `현해탄`이라는 제국과 식민지의 거리는 따라잡아야 할 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유지되어야 할 거리다. 이 차이의 거리가 일본문학과 비교되거나 그것에 비춰지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 한국문학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